아시아의 고급 저널리스트들과 민주화운동가를 하나로 엮는 새로운 국제적 언론실험
세계화(globalization). 참 말썽 많은 화두다.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나 아시아의 시민들에겐 듣기만 해도 지긋지긋하고 속이 답답해지는 말이기도 하다. 이걸 눈치챈 클린턴 같은 이들은 빙긋이 웃으며 또 속을 뒤집어놓는다. “세계화의 속도를 조절하고 각국이 지닌 특수성을 존중하자.” 누가 뭐래도 맞아본 아시아의 의심은 여전하다. “멋지게 포장된 이 말이야말로 선발자본대국들의 갈취수단이다.”
그동안 아시아를 너무 몰랐다
어떻게 이해해야 좋은가. 아시아를 휩쓴 경제대란 속에서도 개방된 사회·경제구조를 지닌 홍콩과 싱가포르 그리고 대만은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입었던 사실을. 미국의 ‘음모론’만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지? 아니면 미국의 음모가 통할 수 있을 만큼 만만했던 우리 구조를 탓해야 하는가.
세계화? 컴퓨터에 달랑 묶인 국제금융시장을 어떻게 외압에 주눅든 은행들이 홀몸으로 거부할 것이며, 위성을 타고 넘나드는 MTV를 또 어떻게 문화우월주의만으로 막아낼 것이며, 블록화된 국제관계 속에서 어이 고매한 단일민족의 기치만으로 품위를 지켜낼 것이며, 복잡한 지역안보체제로 뒤얽혀가는 집단방위개념 속에서 홀로 목놓아 부르는 반공·강군은 무엇으로 이라크식 몰매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한 500년 걸려 아시아 전역의 전통문화에 핵으로 자리잡은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를 이제는 단 몇분 만에 설악동에 앉아 전송사진으로 받아보는 이 속도의 시대를 어떻게 풍류만으로 대신할 것인가. 세계화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사슬구조라면 ‘음모’들을 눈여겨보면서 차라리 사슬을 감고 굿판을 벌여 혼을 빼앗아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 첫 놀음을 우리가 살붙이고 사는 아시아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아시아를 너무 몰랐다. 아시아도 우리를 몰라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초등학생들이 미국의 골짜기 이름을 줄줄 외고 유럽문화를 일갈하는 마당에, 아시아에 대해서는 늘 무슨 ‘못생긴’ 이야깃거리의 주제 정도로만 여겨왔던 우리다. 아시아도 우리에 대해서는 본류제국주의자들의 뒤를 잇는 ‘새끼 제국주의자’ 정도로만 여길 뿐, 5천년 역사 같은 허무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불행하게도 아시아 시민들의 눈에는 우리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있다. 동남아시아를 휩쓸고 다니는 관광객들 가운데 “반말 해대며 큰소리치고 다니는 놈은 다 한국놈이다.” 억울하게도, 한국사람들 가운데 점잖게 다니는 사람들은 아시아 시민들의 눈에는 모조리 일본님들이 되고, 버르장머리 없는 일본사람들은 반대로 한국놈들이 되고 마는 실정이다. 아시아의 가치? 21세기를 진단하는 모든 분야의 연구자들은 ‘아시아의 시대’를 예언하고 있다. 정신과 물질 모든 면에서 아시아가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말이다. 아시아, 여기엔 인류문명의 발화를 주도했던 이라크와 이란이 있고, 송나라의 빛나는 문화를 전파했던 중국이 있고, 세계의 정신사를 지배해온 인도도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세기를 주름잡았던 공격적인 기독교문화에 지친 인류에게 21세기의 대안을 꿈꾸는 회교문화의 원천도 중동 아시아에 자리잡고 있다.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의 경제적 잠재력은 이미 국제경제의 중심축을 아시아로 옮겨놓는 데 일조했다. 중국, 일본, 한국 세 나라가 버틴 극동아시아의 경제력은 이미 자본주의 본향이었던 유럽연합(EU) 전체를 합한 것과 맞먹는 수준에 올라 있다. 이건 단순한 아시아 예찬론도 풍수론도 아니다. 우리가 목을 맨 미국과 유럽은 거꾸로 죽어라고 아시아를 공부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를 뛰어넘는 뉴스와 전망 현실론? 왜 일찍이 제국주의 논자들이 아시아를 세계 최대의 자원창고로 생산기지로 또 소비시장으로 주목해왔던가? 왜 선발자본국들이 아시아를 얻기 위해 발광해왔던가? 여기 구체적인 현실론이 있다. 무역에 목을 맨 한국경제의 수출입 반 이상이 아시아시장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국의 최대 투자지역도 아시아다. 한국의 안보도 아시아의 지역방위개념 속에 들어 있다. 현재 가격폭등으로 세계적 규모의 공포심을 일으키고 있는 원유, 단 30일 만에 한국을 마비시킬 이 원유의 생산지와 수송로도 아시아다. 이렇게 아시아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사활이 걸린 지역이다. “아시아-한국,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것인가?” 바로 이 물음으로부터 ‘아시아네트워크’는 출발한다. 아시아네트워크는 ‘개방성’과 ‘현장성’을 하나로 묶어 아시아를 우리의 품안으로 끌고 올 계획이다. 그동안 지독하게 폐쇄적이었던 우리 언론의 구습에서 벗어나, 아시아 각국의 전문 기자들을 활용해 현장의 눈으로 아시아를 보고 현장의 눈으로 한국을 보자는 뜻이다. 이건 왜곡된 ‘세계화’의 첨병 노릇을 했던 서구언론들이 살포하는 유럽중심주의(Euro-centric) 시각에서 벗어나자는 의지이기도 하며, 동시에 거대자본을 동원한 국제적인 ‘언론제국주의’ 구조에 일방적으로 뉴스의 생산과 보급을 의존해온 우리 언론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방법의 모색이기도 하다. 그동안 외신을 베껴 먹으며 생존해온 부끄러운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들에게 여과되지 않은 아시아의 뉴스와 전망을 신선하게 보급하는 것이 이제 아시아네트워크의 시험이 될 것이다. 아시아네트워크는 ‘두개의 한국’이라는 사안을 아시아의 시민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출발한다. 그동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입장에만 골몰해왔던 태도를 잠시 접어두고 아시아로 그 지평을 넓혀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덧붙여, 아시아네트워크는 그동안 사각지대로 밀려나 있었던 아시아의 민주화와 소수민족 독립투쟁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직접 집필하는 연재물 ‘내릴 수 없는 깃발’을 통해 독자들이 아시아의 이면 정치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 정문태/ 국제분쟁전문 기자·아시아네트워크팀장

세계화? 컴퓨터에 달랑 묶인 국제금융시장을 어떻게 외압에 주눅든 은행들이 홀몸으로 거부할 것이며, 위성을 타고 넘나드는 MTV를 또 어떻게 문화우월주의만으로 막아낼 것이며, 블록화된 국제관계 속에서 어이 고매한 단일민족의 기치만으로 품위를 지켜낼 것이며, 복잡한 지역안보체제로 뒤얽혀가는 집단방위개념 속에서 홀로 목놓아 부르는 반공·강군은 무엇으로 이라크식 몰매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한 500년 걸려 아시아 전역의 전통문화에 핵으로 자리잡은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를 이제는 단 몇분 만에 설악동에 앉아 전송사진으로 받아보는 이 속도의 시대를 어떻게 풍류만으로 대신할 것인가. 세계화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사슬구조라면 ‘음모’들을 눈여겨보면서 차라리 사슬을 감고 굿판을 벌여 혼을 빼앗아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 첫 놀음을 우리가 살붙이고 사는 아시아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아시아를 너무 몰랐다. 아시아도 우리를 몰라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초등학생들이 미국의 골짜기 이름을 줄줄 외고 유럽문화를 일갈하는 마당에, 아시아에 대해서는 늘 무슨 ‘못생긴’ 이야깃거리의 주제 정도로만 여겨왔던 우리다. 아시아도 우리에 대해서는 본류제국주의자들의 뒤를 잇는 ‘새끼 제국주의자’ 정도로만 여길 뿐, 5천년 역사 같은 허무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불행하게도 아시아 시민들의 눈에는 우리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있다. 동남아시아를 휩쓸고 다니는 관광객들 가운데 “반말 해대며 큰소리치고 다니는 놈은 다 한국놈이다.” 억울하게도, 한국사람들 가운데 점잖게 다니는 사람들은 아시아 시민들의 눈에는 모조리 일본님들이 되고, 버르장머리 없는 일본사람들은 반대로 한국놈들이 되고 마는 실정이다. 아시아의 가치? 21세기를 진단하는 모든 분야의 연구자들은 ‘아시아의 시대’를 예언하고 있다. 정신과 물질 모든 면에서 아시아가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말이다. 아시아, 여기엔 인류문명의 발화를 주도했던 이라크와 이란이 있고, 송나라의 빛나는 문화를 전파했던 중국이 있고, 세계의 정신사를 지배해온 인도도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세기를 주름잡았던 공격적인 기독교문화에 지친 인류에게 21세기의 대안을 꿈꾸는 회교문화의 원천도 중동 아시아에 자리잡고 있다.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의 경제적 잠재력은 이미 국제경제의 중심축을 아시아로 옮겨놓는 데 일조했다. 중국, 일본, 한국 세 나라가 버틴 극동아시아의 경제력은 이미 자본주의 본향이었던 유럽연합(EU) 전체를 합한 것과 맞먹는 수준에 올라 있다. 이건 단순한 아시아 예찬론도 풍수론도 아니다. 우리가 목을 맨 미국과 유럽은 거꾸로 죽어라고 아시아를 공부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를 뛰어넘는 뉴스와 전망 현실론? 왜 일찍이 제국주의 논자들이 아시아를 세계 최대의 자원창고로 생산기지로 또 소비시장으로 주목해왔던가? 왜 선발자본국들이 아시아를 얻기 위해 발광해왔던가? 여기 구체적인 현실론이 있다. 무역에 목을 맨 한국경제의 수출입 반 이상이 아시아시장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국의 최대 투자지역도 아시아다. 한국의 안보도 아시아의 지역방위개념 속에 들어 있다. 현재 가격폭등으로 세계적 규모의 공포심을 일으키고 있는 원유, 단 30일 만에 한국을 마비시킬 이 원유의 생산지와 수송로도 아시아다. 이렇게 아시아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사활이 걸린 지역이다. “아시아-한국,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것인가?” 바로 이 물음으로부터 ‘아시아네트워크’는 출발한다. 아시아네트워크는 ‘개방성’과 ‘현장성’을 하나로 묶어 아시아를 우리의 품안으로 끌고 올 계획이다. 그동안 지독하게 폐쇄적이었던 우리 언론의 구습에서 벗어나, 아시아 각국의 전문 기자들을 활용해 현장의 눈으로 아시아를 보고 현장의 눈으로 한국을 보자는 뜻이다. 이건 왜곡된 ‘세계화’의 첨병 노릇을 했던 서구언론들이 살포하는 유럽중심주의(Euro-centric) 시각에서 벗어나자는 의지이기도 하며, 동시에 거대자본을 동원한 국제적인 ‘언론제국주의’ 구조에 일방적으로 뉴스의 생산과 보급을 의존해온 우리 언론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방법의 모색이기도 하다. 그동안 외신을 베껴 먹으며 생존해온 부끄러운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들에게 여과되지 않은 아시아의 뉴스와 전망을 신선하게 보급하는 것이 이제 아시아네트워크의 시험이 될 것이다. 아시아네트워크는 ‘두개의 한국’이라는 사안을 아시아의 시민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출발한다. 그동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입장에만 골몰해왔던 태도를 잠시 접어두고 아시아로 그 지평을 넓혀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덧붙여, 아시아네트워크는 그동안 사각지대로 밀려나 있었던 아시아의 민주화와 소수민족 독립투쟁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직접 집필하는 연재물 ‘내릴 수 없는 깃발’을 통해 독자들이 아시아의 이면 정치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 정문태/ 국제분쟁전문 기자·아시아네트워크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