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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과연 우리를 가만 놔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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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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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귀향 망설이는 민병대 출신 서티모르 난민들

사진/ 75달러를 받았다는 증거를 남기고자 번호판을 들고 ‘증명사진’을 찍어야 하는 이 난민가족에게 독립은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지팡이든 늙은이들과 손에손에 아이들을 거느린 아낙네들의 긴 행렬 속에 한창 힘 쓸 만한 젊은이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끼어 있다.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귀향길에 오른 스물일곱 먹은 시실로 소아레스에겐 그 행렬에 낀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독립해… 좋은… 돌아가… 뭘… 해야….” 애써 태연한 척 멈칫멈칫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1999년 9월의 일들이 아련히 스쳐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보복” 소문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의 결과가 압도적 찬성으로 드러나자, 인도네시아정부군의 지원을 받은 민병대들이 들고일어나 동티모를 불바다로 만든 그날, 혈기왕성한 소아레스도 민병대의 일원으로 친독립계 주민들을 향해 마구 총질하면서 고향 리키샤를 불질렀다.


“지난 건 지난 거지… 뭐.”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소아레스들’에게는 여전히 보복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모든 걸 없던 일로 해야만 한다.” 소아레스의 희망이 과연, 어머니와 자식을 잃고 집을 잃은 주류 친독립계 동티모르 주민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비록 대통령 당선자 사나나 구스마오가 처음부터 용서와 화합을 내걸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본보기를 얻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역점을 두면서 사회통합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지만.

동티모르, 유서 깊은 보복의 역사를 익히 알고 있는 난민들에게는 그리 실감나지 않는 소리일 뿐이다. 소리 없이 벌어지고 있는 동티모르의 보복 소문이 꼬리를 물고 국경 너머 난민촌에까지 오는 동안 자가발전식으로 증폭되는 실정이니.

5월15일 오전 10시, 서티모르의 모타아인 국경검문소 앞에는 주로 아탐부아 지역에 흩어져 살던 300여명의 동티모르 난민들이 귀향수속을 밟고 있다. 초췌한 낯에 웅크린 긴장감이 귀향 난민들의 것이라면, 상당히 도도한 태도와 지나친 듯싶은 자부심 같은 것들은 인도네시아 정부군과 시민단체들, 그리고 오가는 유엔평화유지군들의 것으로, 이 외진 국경의 아침은 확연하게 다른 두 종류의 인간상을 만들어놓았다. 국제사회의 지원 아래 인도네시아 정부가 지급하는 가족당 75달러의 귀향비용을 받아든 이들은, 하나같이 검정색 ‘라이방’에 폼나는 기관단총을 움켜쥔 일당 95달러짜리 국제평화유지군 병사들에게 일찌감치 기가 질려 있었고, 이도저도 아닌 인도네시아 군인들은 꼬챙이를 휘두르며 거만하게 줄을 잡고 다닌다.

현장의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직원은 지금까지 20만여명의 난민들이 동티모르로 되돌아갔고, 아직 서티모르의 쿠팡과 아탐부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약 5만5천명의 난민들도 앞으로 6개월 안에 모두 돌아갈 것이라고 성과를 밝힌다. 그러나 난민촌을 둘러보면 사정은 말처럼 그리 간단치 않다. 5월14일 아탐부아의 테누부트 난민촌은 여전히 확신 부재의 혼란스런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동티모르 독립은 내 일이 아니다. 난 인도네시아 시민으로 여기서 살고 싶다.” 미구엘 소아레스 바보가 주도한 엘메라 지역 민병대 ‘다라 인테그라시’의 일원이던 안토니노 마틴(33)은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을 강조했다. “돌아가봐야 집도 없고 먹고 살 길도 없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깊은 고민은 아내 도미고스 데 알베스(33)를 통해 드러났다. “불안하다. 우리가 민병대였다고 주민들이 보복하지나 않을지. 꼭 남편이 돌아가자고 하면야 가겠지만….”

“몰래 무기를 묻어두었다”

사진/ 동티모르로 돌아가는 난민행렬. 돌아가는 기쁨보다는 정체불명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5만5천여명의 난민들. 저마다 사정이야 다르겠지만 쉽사리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한몸이다. 이들 가운데 민병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이들이 결국 문제의 시작이자 종착지인 셈인데,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다. “벌써 3년째 접어들고 있어, 돌아갈 수 있는 이들이야 대부분 돌아갔다고 보면 된다. 아직까지 남은 이들은 남다른 사정이 있다는 뜻이고, 대개 보복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다.”

현장 취재에 오랫동안 매달려온 야숙(자와포스터 쿠팡 주재 기자)의 말마따나, 현재 난민촌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귀향문제를 놓고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계획도 전망도 없이 다만 인도네시아 정부가 쫓아내지만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낼 뿐이다.

“신변안전만 보장된다면 돌아가고 싶은데 언제가 될지….” 친인도네시아계 민병대를 지원하다 지금은 친독립파가 되었다는 펠리스베르토 다스 네베스(43)처럼 대부분의 난민들은 확신 부재에 시달리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혼란은 난민촌만의 것도 아닌 듯싶다. 아탐부아나 쿠팡의 시민들 사이에는 민병대 박멸을 강력하게 외친 관할지역 사령관 윌리엄 다코스타 소장에 대한 평판이 자자하다. 반대로 동티모르 쪽에서는 여전히 인도네시아군에 대한 불신이 수그러들지 않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단 한명의 동티모르 민병대도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다. 민병대가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면 정부군의 철저한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다코스타 소장은 실제로 민병대의 무기를 회수하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동티모르의 마탄 루악 소장(방위군 사령관)은 인도네시아군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는다. “민병대의 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든 건 사실이다. 그래도 여전히 민병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도네시아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뜻이다. 군 말고 누가 하겠는가.”

실제로 난민촌에 묻어 지내는 민병대 조직원들을 취재해보면 동티모르쪽의 불만이 근거 없는 볼멘소리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왜 무기를 다 넘겨주겠나. 우리가 바보인가.” 레오니오도(가명·아이타락 민병대 출신) 같은 이들은 일부 무기를 형식상 인도네시아군에게 넘겨주었지만, 아직도 다량의 무기를 무덤이나 나무둥치 밑에 묻어두었다고 귀띔해준다. 뿐만 아니라, 악명 높은 민병대의 우두머리 유리코 구테레스나 조아오 다 실바 타바레스 같은 이들은 자카르타에 살다시피 하면서 인도네시아 정치권과 군부를 드나들고 있다. 이러니 인도네시아 정부나 군이 동티모르 당국으로부터 불신을 당할 수밖에. 게다가 이 민병대들이 인도네시아 내부에서 또 다른 분리독립 분쟁을 겪고 있는 말루쿠나 아체와 서파푸아에 파견되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도는 판이다.

민병대 우두머리들 사이의 이견

또 다른 혼란의 주범으로 민병대 우두머리들 사이의 이견을 꼽을 만하다. 이들은 상반된 이해관계로 사태를 꼬이게 하며 난민촌 내부를 경직시켜왔다. 비교적 온건파로 꼽히는 조아오 다 실바 타바레스는 난민들의 귀환을 적극 지지해온 반면, 강경파 유리코 구테레스는 난민 귀환을 막고 있는 실정이라, 난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느끼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 전처럼 난민촌 내부에서 민병대의 직접적인 위협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서로 눈치를 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듯하다.” 야숙 기자의 말처럼, 인도네시아 당국의 표현과 달리 아직 난민촌의 완전한 자유를 말하기에는 이른 감이 든다.

“구스마오도 훌륭하고 구테레스도 훌륭하다.” 이렇게 양쪽을 모두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바로 서티모르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동티모르 난민들이다. 제 몸이 나고 자란 땅, 그 땅의 독립에서 소외당한 이들, 철저히 무시당해버린 이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는 무기력한 공간, 그곳은 인도네시아 땅 서티모르의 찌그러진 난민촌이다. 전체 국민의 7%에 이르는 5만5천명을 어둠 속에 내버려둔 채 동티모르는 독립의 환희에 젖어들고 있는 모양이다. 이들을 모두 부둥켜안고 완전한 독립을 노래할 수는 없었는지….

판만 거창하게 만들어놓고는 몸을 사린 유엔도, 잇속을 노려 깨끗하게 손을 씻지 못한 인도네시아도, 더 적극적으로 품을 열고 형제를 받아들이지 못한 동티모르 당국도, 모두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신생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찌그러진 독립선포식은 치러졌다.

서티모르 아탐부아 국경=

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아흐마드 타우픽/ 인도네시아 시사주간지 <템포> 기자

유니스 라오/ 전 싱가포르 <스트레이츠타임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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