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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입맞추라,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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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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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최초 신생국가 ‘동티모르’ 탄생의 현장…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위하여

사진/ “분쟁의 과거를 녹이고 동티모르여 영원하라.” 동티모르 독립선포 기념식에서 학생들이 촛불의식을 하고 있다.(AP연합)
5월18일 독립선포 이틀 전 딜리. 속살까지 파고드는 뜨거운 햇살 아래 군악대를 앞세운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의 옛 게릴라 전사 500여명이 정부청사 주변을 행진했다.

거의 같은 시각인 오후 3시45분. 인도네시아 전함 한척이 정부청사 앞 마당 격인 딜리항에 닻을 내렸다. 도킹 속도를 위반한 채 딜리항에 정박한 전함에서는 인도네시아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시민들은 부둣가로 몰려갔다. 시민들의 뇌리에는 이내 1975년의 야만적인 학살이 떠올랐고, 전함과 시민들 사이를 멀찍이 갈라놓은 철책 사이로 분노한 시민들은 욕설을 퍼붓거나 돌을 던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전함에 돌을 던지다


인도네시아 전함은 밤이 늦어서야 철수 명령을 받고 딜리항을 떠났다. 5월19일 오전 11시 긴급 기자회견을 연 라모스 홀타 외무장관은 인도네시아 강경파들의 짓궂은 행동에 놀란 마음을 감추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쪽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메가와티의 신변안전을 위해 모든 협조를 하겠다고 한 걸, 그쪽에서는 해군을 파견할 수 있다고 해석한 모양이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라모스 홀타였지만, 이날 아침만은 상당히 긴장한 모습이었다.

출생신고도 못한 상태에서 동티모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셈인데, 국제관례상 2천명의 병력과 6척의 전함을 다른 나라의 영해에 불법파견한 사실도, 현재 5천여명의 유엔평화유지군(PKF)과 미국·프랑스의 전함이 주둔하고 있는 유엔 관할지에서 이런 군사적인 행위가 일어났다는 사실도, 또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가고 말았다는 사실도, 모두 만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더 놀라운 건, 이미 기자도 1주일 전에 자카르타의 취재원에게서 해군이 함정 5척을 파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는데, 유엔도 동티모르 외무부도 팔짱만 끼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는 사실이다. 몰랐다면 바보고, 알고도 가만있었다면 국제적인 도발행위를 방조한 공범이라는 말이 되고 만다.

한쪽에서는 이런 ‘깜짝쇼’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독립선포일, 5월20일 현지시간 자정을 향한 동티모르의 시계는 쉬지 않고 가고 있다. 독립국가의 시민이라는 자부심도 같은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행복 그 위의 어떤 차원이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참아왔는가!” 딜리 시민 마누이엘 데 올리비아(39)는 요즘 당당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 근사해보일 수가 없다고 너스레를 뜬다. 이렇게 독립의 계절을 맞은 시민들의 5월은 배고픔도 가난도 문제될 게 없는 ‘멋진 신세계’다.

40%가 넘는 시민들이 빈곤에 시달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52%가 넘는 시민들이 글을 읽지 못하는 나라,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 동티모르의 5월 속에서 사람이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발견한다.

이 행복한 사람들은 이제 나름대로 독립국가의 시민으로 살아갈 꿈을 꾼다. 젊은이들은 저마다 박사가 되고 과학자나 공학자가 되는 꿈에 부풀었다. 비록 실험실이나 기자재가 없고 학교에 싸갈 도시락도 없는 형편이지만 말이다.

“총 살 돈으로 책과 약품을 사겠다”

사진/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ALINTIN)의 노병들에 대한 대우는 신생공화국의 도덕성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될 듯 하다. (정문태)
시민들의 그 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눈치챈 대통령 당선자 사나나 구스마오는 선언적인 표현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독립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시민이 될 우리 모두는 수많은 난제 앞에 설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대통령으로 뽑은 의미는 더 나은 삶을 가꾸도록 명령한 것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겠다.”

그러나 신생독립국가 동티모르의 미래를 장밋빛 낙원으로 그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동티모르 유엔과도행정기구(UNTAET)가 손을 터는 5월20일 0시부터 동티모르 독립정부는 모든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인수하지만 경험부재와 재원부족으로 상당한 곤욕을 치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또한 추후 2년간 단계적으로 PKF가 철수한다는 계획은 국내외적으로 안보문제에 심상찮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런 까닭으로, 독립정부가 심혈을 기울이는 해외투자 유치부문은 아직 신통치 않다. 정세를 읽는 가장 정확한 눈이 자본이고 보면, 독립정부에서는 머뭇거리는 투자가들의 손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개발과 복구자금으로 국제사회가 추후 3년간 4억4천만달러를 보장했지만, 여전히 해외자본은 달려들지 않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다. 현재까지 1150개의 해외 사업체들이 유입되었지만 대부분 유엔을 상대로 장사하는 수입과 소매 분야에 치중되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태다. 그만큼 투자·관광국장 프란시스코 도 레이스의 한숨은 깊어만 간다.

사진/ 붕괴된 교육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동티모르 최대 현안으로 떠올라 있다. 딜리 제6중학교. (정문태)
원조보다는 투자를 바란다는 알카티리 총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한국 투자가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며, 섬유나 농업 분야에 대한 한국의 진출을 크게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의 바람과 달리 “새 정부가 친노동자정책을 중심에 놓을 것이고 미국 달러의 통용 탓으로 임금이 서티모르보다 높아 경쟁력이 별로 없다”며 스티브 위할디아 같은 사업가들은 동티모르의 투자환경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정부는 교육과 공중보건 부문에 전력을 다한다는 놀랄 만한 청사진을 내놓았다. 2006년까지 단계적으로 정부예산의 50% 이상을 교육·공중보건에 투입하겠다는 그야말로 야심찬 계획이다.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외침을 당해본 국가들이 대부분 막대한 방위비를 지출해온 것과 달리, 개인 화기를 소지한 1500명의 육군과 2대의 경비정을 운용할 해군 50명을 먹여살리는 비용만 책정한 최저 방위예산 원칙이다. 총을 살 돈으로 책과 약품을 사겠다는 이 용기, 그것도 총 예산의 50%를 투입하겠다는 신생독립국가의 발상을 인류의 희망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새 독립정부의 예산편성 계획이나, 아직 뚜렷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일하는 이들을 중심에 두고 ‘동티모르식 경제’를 찾는다는 알카티리 총리(경제정책최고책임자)의 의지를 종합해보면, 상당히 ‘건강한 정부’ ‘건전한 정책’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문제는 이제부터 운용의 묘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달렸는데, 경험부재를 잘 극복한다면 신생 독립국가의 그럴싸한 표본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450년 식민통치 접는 인류사의 전진

사진/ 유엔평화유지군끼리 주고받는 훈장잔치로 끝내고 말 것인가. 신생독립국을 위한 진정한 평화의 사도가 될 것인가. (정문태)
5월19일 오후 지난 시절의 혼란과 다가올 미래의 불확실성을 묻어놓고 10시간 남짓 남은 21세기 최초의 신생 독립국가 탄생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정부청사로 향하는 길목마다 저지선을 쳐놓았고, 하늘에는 각종 항공기들이 줄줄이 날아들고 앞바다에는 순시선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나만의 잔치가 아닌 모두의 잔치를 염두에 둔, 국제적인 행사로 치르게 될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출발은 450년 식민통치를 접는 인류사의 전진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티모르는 5월20일 0시를 기해 신생 독립국가로 탄생했다.

구석구석 기웃거리는 시민들의 호기심, 먼지를 떨어내는 국가적인 대청소, 공무원들의 분주한 움직임….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 특별한 느낌은 별로 없다. 지난 1999년 국민투표 때 받은 감명보다는 좀 떨어진다”고 웃어넘겼지만 피곤이 역력히 묻어나는 대통령 당선자 사나나 구스마오의 표정, 이 모든 풍경들은 마지막 압박의 굴레를 벗어난 동티모르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소중한 시간들처럼 느껴진다. “하루 몇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강행군을 해왔지만, 내 일생에 단 한번뿐인, 동티모르 역사를 통틀어 단 한번뿐일 독립선포일을 준비한다는 생각에 피곤함을 느낄 겨를도 없다.” 외무부 공보책임자 사비오 도밍고스의 표현처럼 동티모르는 조심스러운 긴장과 어수선함이 교차하는 가운데 독립의 역사적인 순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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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카르타·딜리(동티모르)·아탐부아(서티모르)=
    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아흐마드 타우픽/ 인도네시아 시사주간지 <템포> 기자
    유니스 라오/ 전 싱가포르 <스트레이츠타임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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