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피살당한 ‘합의정치’

409
등록 : 2002-05-15 00:00 수정 :

크게 작게

그 유명한 네덜란드 정치문화는 끝장났나…포르투인 피살과 극우의 망령

사진/ "네덜란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네덜란드 현대 정치사에서 최초로 암살당한 극우정치인 포르투인. (GAMMA)
지난 5월5일, 시라크가 82%라는 역대 최고의 지지율을 얻으면서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차 투표 이후 2주 동안 ‘르펜’이라는 몸살을 앓은 유럽 전역은 시라크의 ‘씁쓸한 승리’로 잠시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유럽 사회는 또다시 경악과 우려 속에 빠졌다. 5월6일 네덜란드의 극우정치인 핌 포르투인(54)이 방송국 주차장이라는 공공장소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이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극우정당들은 그의 죽음을 ‘좌파에 의한 정치적 암살’이라고 단정지었다. 포르투인 지지자들에 의한 크고 작은 소요까지 끊이지 않았고,이들은 네덜란드 사민당 총리 후보의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다.

왜 경호원이 없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혜성같이 등장하여 정치적 돌풍을 일으킨 주인공이 단 한명의 범인의 총격을 받고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있을까? 도대체 그를 지켜야 할 경호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포르투인이 방송사 주차장에서 머리와 가슴 등에 8발의 총격을 받고 죽어가는 동안 하다못해 방송사의 청원경찰이라도 달려왔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영국의 외무장관은 범행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네덜란드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어떻게’라는 의혹을 풀어낼 실마리가 담긴 말이다. 그가 언급한 “우리가 알고 있던 네덜란드”란 좁은 의미로 네덜란드 특유의 정치문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매주 금요일 오후, 네덜란드의 주요 정치도시인 헤이그 중심가를 걷다 보면 사람들은 총리를 비롯하여 내각의 각료들과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내각회의를 마친 이들이 큰 도로를 건너 기자회견장까지 어슬렁거리며 ‘걸어서’ 이동하기 때문이다. 일부 내각 각료들은 말쑥하게 차려입은 정장차림으로 날렵하게 자전거에 올라타곤 한다. 자신들의 소속정당으로 가는 길이다. 이들에게 경호원은 없다. 일부 시민단체 운동가는 총리가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다. 총리가 알아서 극복할 일이다.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이러한 모습들은 ‘합의정치’라는 고유명사를 탄생시킨 네덜란드 정치문화의 한 단면이다. 각 정치세력에게 ‘관용과 합의, 그리고 책임’은 제1의 행동원칙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 각각의 정치색으로 서로 다른 정치노선을 그려나가는 것이 오래 전부터 전통으로 자리잡아 왔다.

약 한달 전 네덜란드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하였다. 보스니아에 유엔평화유지군(PKF)으로 참여한 네덜란드 군인들이 민간인 학살에 가담한 것을 언론에서 폭로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8년간 집권한 사민당 출신 총리는 이번 일로 은퇴를 발표하기까지 하였다. 이른바 네덜란드식 합의정치의 참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유럽의 부국들도 위험하다

그러나 지난 월요일 이후, 네덜란드의 ‘정치신화’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에 이견을 다는 이는 없는 듯하다. 이는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인기 정치인 포르투인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포르투인 현상’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인종차별적 우익 대중주의의 걷잡을 수 없는 확산이 네덜란드 정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국가들 중 매우 낮은 실업률을 자랑하고, 재무장관이 재정흑자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곳이 바로 네덜란드다. 이곳에서마저도 인종주의가 득세하는 것은, 인종주의의 마력이 유럽 모든 국가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대변하듯 우익 대중주의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갈등과 계층적 분화가 작은 노르웨이·덴마크·스위스 등 부유한 유럽 국가들에서도 그 세를 나날이 확산하고 있다. 네덜란드 정치사에서 최초의 정치인 암살사건이 5월15일 총선에 어떤 방향으로 표를 몰아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네덜란드 정치가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베를린=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