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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누가 혁명을 피로 물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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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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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민중들을 만나 쿠데타의 진실과 차베스가 가야 할 길을 들어본다

사진/ “차베스여! 영원히 민중과 함께!” 우르타도가 4월11일 밤에 죽은 남편이 남긴 벽구호를 가리키고 있다.
카리브해 남쪽에서 베네수엘라 해안 상공으로 접어들면 석유화학단지의 높이 솟은 굴뚝들이 보이고, 뒤이어 경사가 아주 급한 구릉들 위에 붉은 벽돌집들이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바다에 연한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에서 ‘가장 안전한’ 고급택시를 타고 수도 카라카스로 접어들면 좌우로 비탈진 구릉 위에 빼곡이 들어선 빈민촌들이 상공에서 바라본 집들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베네수엘라는 하루에 256만배럴을 생산하며 추정매장량까지 합치면 3천억배럴로 세계에서 석유매장량이 가장 많은 나라다. 1980년대 말까지 중남미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다. 1958년 군사독재자 페레스 히메네스가 물러난 이래 40년 동안 ‘대의민주주의’가 자리잡아왔다.

상처받은 빈민의 대통령


베네수엘라 일간지 <엘문도 라파엘 델 나랑코> 편집장은 말한다. “석유는 물론이고 금·다이아몬드 광산이 있고 1년에 3모작을 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난 40년간 기존 정당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나라를 ‘가난하고 부유한 나라’라고 합니다.”

98년 대통령 선거 당시 25년 동안 석유수출로 3천억 달러를 벌어들인 나라에서 전체 노동인구 가운데 4명 중 하나가 실업자였다. 국민의 80%는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빈곤 속에 허덕였고, 빈곤층의 자녀들 가운데 200만명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 가운데 20만명은 거리에서 구걸하면서 살았고, 4명 가운데 1명은 제대로 읽고 쓸 줄 모른다.

92년 특수부대 중령의 신분으로 쿠데타를 포기하는 대신 텔레비전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어 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우고 차베스는 좌파연합정당 ‘조국의 기둥’(PP)을 결성해 56.5%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40년간 베네수엘라 선거 사상 가장 큰 표 차로 승리한 것(2위 39.5%)이며, 역대 최고의 투표율 65%에 역대 최고의 지지율을 얻은 것이다.

“빈민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공언한 그는 99년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제헌의회를 소집해 국민에게 국민투표권·국민소환권을 보장하고 동시에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강화한 새 헌법을 제정했다. 그 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고유가정책으로 재정확보에 나서며 미국에 도전했다. 또한 49개의 새로운 개혁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는데, 이 법안엔 공공시설 및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자작농을 육성하기 위해 개인소유 유휴농지를 국가가 수용하는 토지개혁법안이 포함되었다.

이에 맞서 기득권층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98∼99년에 40억달러를 국외로 유출시킨 기득권층은 2002년에 들어서 다시 달러를 해외로 유출시켰다. 베네수엘라 재벌언론들은 차베스 정부가 콜롬비아 반군과 협력한다며 공격의 포문을 열었고, 뒤이어 베네수엘라 군대의 장교들이 차베스 대통령이 반민주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사임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국영석유회사(PDVSA)가 석유수출 수익금을 공공재정으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한 석유법 개정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정부가 간부들을 해임하자 국영석유회사는 파업을 선언했고, 베네수엘라 노동자총연맹(CTV), 베네수엘라 자본가 단체인 상공인연합회(Fedecamaras)가 이에 동조해 4월11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대통령궁 근처에서 일어난 이날의 유혈사태로 쿠데타가 시작됐다. 그리고 유혈사태를 일으킨 건 반차베스 진영의 사주를 받은 저격수들이라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4월11일 유혈사태의 책임은?

사진/ 4월11일 총격 사건이 있던 현장에 놓인 추모의 장미 한 송이. 이날 2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4월11일 평화대행진에 대해 베네수엘라 노동자총연맹 산하 베네수엘라 석유노동조합연맹 카스토르 베시노 선전부장은 “우리 연맹은 총파업은 물론이고 시위에도 공식적으로 참가한 적이 없다”고 밝히면서 “이번 시위는 국영석유회사의 경영진들이 주도했고, 중간직 사원들을 끌어들였으며, 노조원들인 계약직 사원들까지 참여를 종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국영석유회사 본부 앞에서 만난 4월11일 시위 참가자 루이스 모리 본사 관리실장은 “당시 시위에서 양측의 충돌은 예정되어 있었다”고 전하면서 “애초 행진일정은 미란다주에 자리잡은 국영석유회사 지사까지였는데 행진 전날 시위일정을 대통령궁으로 바꾼 이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시위지도부를 비판했다. 이에 반해 대통령궁까지 가두시위에 참석한 재정부의 헨리 오칸도는 “시위는 평화적이었으며 어린이와 노인 할 것 없이 즐거웠다”고 전한다. 평화행진을 피로 물들인 것은 차베스 지지자라는 주장이다.

미국 출신으로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의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인 그레고리 윌퍼트는 총격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있었다. “당시 제가 도착했을 땐 이 도로엔 핏자국이 선명했어요. 이곳은 차베스 지지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지요.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둘러싼 건물 위쪽을 가리키며 ‘저격수가 있다!’고 외쳤지요.” 이 총격은 반차베스 시위를 호위해오다 차베스 지지자를 향해 발포한 카라카스시 소속 경찰, 대통령궁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차베스를 지지하는 볼리바르 서클의 구성원들, 그리고 아직도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저격수들에 의해 벌어졌다. 총격사건 현장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바르가스 병원의 응급실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사건 당일 “우리 병원에 도착한 11명의 사망자들 대부분이 두개골에 총상을 입었다”고 진술함으로써 저격수의 존재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4월11일 차베스 지지자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있는 카라카스 시경찰(베네수엘라 국영방송사 제공).
“2002년 4월11일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을 기리며”라고 적힌 십자가 앞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 시라 아스투비요(56)는 “이번 사건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자들이 벌인 전쟁이에요. 지난 3년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혁명이 진행되어 왔어요. 그런데 누가 이 혁명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죠?”라며 절규했다.

4월12일 쿠데타 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카르모나 에스탄가 베네수엘라 상공인연합회장이 추대되었다. 그는 취임 즉시 연방의회와 대법원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차베스 내각의 각료들과 주지사 등이 체포됐고 49개 개혁 법안도 폐지됐다.

한편 대통령의 사임소식이 발표되던 4월12일 새벽부터 카라카스 빈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은 정직하게 보도하지 않았지만 약 15만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들은 카라카스시 거리의 벽 곳곳에 “(임시대통령) 카르모나! 암살자! 널 작살내주마!” “볼리바르 헌법 만세! 차베스 만세!” 등 거침 없는 구호를 새기며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카라카스시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이때부터 대통령이 귀환하던 4월14일까지 총 65명이 죽었고 417명의 시민들이 다쳤다.

차베스 “미 비행기 보았다”

일군의 지지자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민영방송국에 몰려가 대형 유리창으로 된 벽을 망치로 부숴버리기도 했다. 그것은 언론에 대한 빈민들의 강한 불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쿠데타 당일에는 10분마다 반차베스 시위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던 베네수엘라 언론들이 차베스 복귀시위에 대해서는 아예 보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4월14일 대통령이 복귀하던 날엔 <엘 우니베르살>, <엘 나시오날> 등 주요 일간지는 신문발행조차 하지 않았다.

카라카스 거리를 돌아보면 빈민들의 목소리는 가판대에 비치되는 신문에 담기지 않고 거리의 외벽에 담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1야당 민주행동 중앙당사에서 10m 정도 떨어진 외벽에 쓰인 “차베스 네 비행기를 타고 쿠바로 떠나라!”라는 구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반차베스 진영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대통령궁에서 한 블록 떨어진 총격사건의 현장 우르다네타 거리엔 늘 20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베네수엘라 언론에 분노하며 외신기자들에게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다가온다. 다른 사람의 증언이 끝날 때까지 참고 기다릴 만한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로 증인의 말을 보충하거나 새로운 진술을 하면서 생사에 갈림길에 선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전한다.

대통령 복귀의 결정적인 계기는 대통령을 지키고 있던 한 사병이 외부에 전한 차베스의 친필 편지가 국영방송에 공개되면서였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현역이었을 때 재직하던 42공수여단의 여단장은 사임했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반발했다. 이를 시작으로 군부의 차베스 지지자들이 쿠데타 정부에 항명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차베스 대통령은 카리브해의 라 오르칠라섬에서 돌아왔다. 그는 복귀 뒤에 가진 첫 외신기자회견에 미국 비행기가 라 오르칠라 해군기지에 있었다는 것에 의문을 표시했다. 그때부터 미국 개입에 대한 논란이 베네수엘라를 뒤덮기 시작한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주요 무역상대국이며 베네수엘라는 미국에 세 번째로 원유를 많이 수출한다. 또한 미국은 우고 차베스 축출을 가장 먼저 환영한 아메리카 국가였다. 대통령궁 앞에서 에콰도르 출신 민속공예품업자인 하이메 에밀리오 페레스는 “에콰도르·파나마·칠레·니카라과에서 그랬듯이 이번 사태에도 미국은 확실히 개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차베스 대통령은 복귀한 뒤 국영석유회사의 이사진 교체를 백지화하고 내각개편을 단행했다. 야당의 대통령 소환을 위한 국민투표 요구에는 “2003년 이후에 국민투표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답했다. 현재 우고 차베스 정부는 인권침해를 규명하기 위해 ‘진실위원회’를 구성했고, 정부 여당이 주도하는 의회는 청문회를 통해 쿠데타의 진상을 규명하고 있다. 대통령은 ‘대화를 위한 국가자문위원회’를 만나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여보! 당신이 어디 있든지…”

베네수엘라 일간지 <울티마스 노티시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호세 비르투오소 예수회 신부는 쿠데타를 용인한 벨라스코 추기경을 비판했다. 그는 국민의 95%가 가톨릭인 이 나라에서 “이번 쿠데타 사태와 관련해 가장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가톨릭 교회”라고 말했다. 또한 “대화의 시작은 헌법과 대통령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남미 북부의 5개국을 스페인에서 해방시키고 라틴아메리카 신생 독립국들의 연합을 이뤄내 유럽과 미국의 팽창정책에 맞서려 한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는 통치 불능”이라는 말을 남기고 베네수엘라를 홀연히 떠났다. 미국과 내부의 특권층이 주도하는 경제질서와 외교질서에 맞서 새로운 질서를 실험하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베네수엘라는 통치 불능!”이라는 절망적인 결론을 내릴 것인가.

“이번 사태는 시민들끼리 서로 충돌하고 죽이도록 만든 사람이 책임자입니다.” 지난 4월11일 총격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마다리스 우르타도 씨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여성 게릴라 출신인 그는 지난 80년대 초 니카라과의 한 농민마을에서 베네수엘라 출신 사회주의자 남편과 처음 만났다. “지금 인권침해를 규명하기 위해 진실위원회가 구성하고 있어요. 그러나 유가족들은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어 진실위원회 참여를 망설일 것입니다. 잠시 갈등이 잠복하고 있을 뿐 언제 다시 이런 폭력사태가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진실이 알려지면 곤란할 세력들로 인해 피해자들이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베네수엘라 시민들이 이번 사태에서 느낀 가장 큰 공포일 것이다.

“여보! 당신이 어디에 있던지 진실을 찾는 내 모습을 보게 될 거예요!” 그는 다시 12살배기 막내아들의 손을 굳게 잡고 약속한다. 그의 다짐은 집 건너편 가게 벽에 남편이 죽기 며칠 전에 적어놓은 “차베스여! 영원히 민중과 함께!”라는 유언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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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카스=글·사진 박정훈 통신원 jhpark200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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