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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쿠마라퉁가의 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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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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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여성정치 ㅣ 스리랑카

타밀타이거에 대한 전쟁선포로 여성정치에 대한 혐오감만 높이고 소수당 전락

사진/ 사마두 위라와르네(Sumadhu Weerawarne) ㅣ <아일랜드뉴스페이퍼> 기자
1960년 스리랑카는 세계 최초로 여성총리를 배출했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였다. 1994년과 1999년 연임에 성공한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현 대통령은 그녀의 딸이다.

이렇듯 여성대통령과 총리를 배출하면서 아시아 여성정치 무대에 강한 인상을 심어놓은 게 사실이지만 ‘우두머리’를 빼고 나면 여성정치를 지탱할 만한 저변이 없는, 그야말로 남성들의 판이라 부를 만하다. 중앙의회의 여성의원 비율이 4% 수준이고, 지방의회로 가면 2%로 더 한심해지는 실정이다.

최초의 여성총리, 반다라나이케


그런데도 일부 여성들이 정치적 심장부에 진입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한마디로 ‘가족관계’라는 중요한 뒷심이 작용한 탓이었다. 최초의 여성총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가 자신의 정치적 역량으로 총리가 되었다고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나는 가정주부로 일해왔을 뿐이다.” 그녀가 스스로 자랑스레 말했듯이, 실제로 1959년 총리인 남편 반다라나이케가 암살당하면서 후임을 선출하지 못한 여당이 급작스레 시리마보를 추대하여 정치무대에 입문한 경우다.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역시 그녀의 어머니처럼 개인적인 비극을 겪으면서, 동시에 가문의 명성으로 대통령이 된 인물이라 부를 만한데, 남편이자 영화배우였던 비자야 쿠마라퉁가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 1988년 암살당하면서부터 그녀의 정치인생은 시작되었다. 총리를 지낸 남편(아버지)과 그의 명성으로 총리를 지낸 아내(어머니) 그리고 장인, 장모의 후광을 입고 정치인이 된 사위(남편)의 유명세를 모조리 묶어 탄생한 ‘종합판’이 바로 쿠마라퉁가 대통령인 셈이다.

어쨌든 1994년 쿠마라퉁가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만 해도 시민들 사이에서 그녀는 희망의 전도사 같은 대접을 받았다. 오랫동안 정치판에서 굳어진 남성 경쟁자들보다 훨씬 참신하고 성실한 이상주의자로 인식된 탓이었다. “스리랑카 내전의 미망인!” 선거유세 동안 쿠마라퉁가가 외치고 다닌 이 말은, 인권침해와 내전의 종식을 약속하는 그녀의 정치적 상징이 되면서 시민들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사진/ 쿠마라퉁가(왼쪽) 대통령이 정부 행사에 참석하던 모습. 그의 가장 중대한 실패는 ‘전쟁확대’였다. (GAMMA)
그러나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쿠마라퉁가는 경험 부재에다 독선적 태도 탓으로, 지난 1970년대 후반부터 무장 독립투쟁을 벌여온 타밀타이거를 상대로 평화협상을 주도하기에는 힘이 달렸다. 그녀는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네달 동안 추진한 평화 성취 노력이 실패하자, 모든 약속을 뒤집고 이른바 ‘평화를 위한 전쟁’을 선포해버렸다. 군 예산은 1년 만에 배로 치솟았고 모든 사회적 여력은 전쟁판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시민은 전시 동원령 수준에 버금가는 협박에 시달렸고 사회는 전시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그녀의 집권 8년이 남긴 것은 피폐한 경제와 살해된 시민뿐이었다. 아무도 이 여성정치인이 사회를 이렇게까지 흉악하게 몰아붙일 것이라고 믿었던 이는 없었다. 쿠마라퉁가의 가장 중대한 실패는 ‘전쟁 확대’다. ‘전쟁 종식’을 약속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결론적으로 시민사회가 어리석었다! 전쟁과 폭력 같은 주제들을 남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기며 여성대통령 쿠마라퉁가를 뽑을 때까지만 해도 환상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었던 결과다. 결국 쿠마라퉁가는 스리랑카에서 오히려 여성정치에 대한 혐오감만 높여놓고 말았다. 선거만 해도 쿠마라퉁가 정부 아래서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 쿠마라퉁가가 주도하는 집권여당의 한 당원이 야당의 여성후보를 발가벗겨 채찍질하며 길거리를 행진하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게다가 2001년 선거에서 그녀의 당이 패배할 때까지도 여성대통령인 쿠마라퉁가는 여성문제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쿠마라퉁가와 차별성 보인 새 정부

스리랑카의 여성은 경쟁자인 남성들과 동등하게 일할 권리를 지녔다. 대학의 법학과나 의학과의 학생 비율에서도 오히려 여성이 남성을 압도했고, 불교 자체도 여성에 대해서 매우 자유롭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쿠마라퉁가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승려들이 축복했던 것은 좋은 예다. 그러나 쿠마라퉁가는 사회의 절반이자 한 축인 여성과 상의하기를 스스로 포기했고 그 모든 지지자들과 협력을 거부해버렸다.

2001년 12월 총선에서 시민들은 이런 쿠마라퉁가를 심판함으로써 그녀는 현재 소수당으로 전락한 여당을 붙들고 정치적 고통을 당하는 중이다. 보란 듯이, 라닐 위크레메싱게 신임 총리가 이끄는 새 정부는 즉각 타밀타이거와의 평화협상을 통해 휴전에 도달함으로써 쿠마라퉁가와 큰 차별성을 보여주고 말았다. 오히려 쿠마라퉁가는 이런 평화적 노력들을 비난할 정도로 감각을 상실해버린 상태고. 만약 평화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쿠마라퉁가의 정치적 미래는 처량해질 수밖에 없는 실정인데, 문제는 시민들이 그녀의 미래와는 상관없이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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