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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프랑스는 수치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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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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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로 르펜을 선택한 프랑스의 절망…정치적 무관심이 극우의 힘을 키웠다

사진/ 선거뒤 시라크의 포스터에는 거짓말쟁이, 도둑놈(르펜이 시라크를 일컫는 명칭이기도 하다)이라는 낙서가 도처에 난무하고, 르펜의 포스터는 대부분 뜯어져 있다. (이선주)
정치학 그랑제콜인 파리 시앙스포는 4월25일 ‘죽은 하루’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하루 수업을 중단했다. 학교 전체가 휴교를 했다. 학생들은 이날을 친민주주의와 반극우파를 기치로 21일에 있은 대통령선거 1차투표결과를 분석·토의하는 날로 정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사회당 의원이자 전 경제재무부장관을 비롯하여 유수의 언론인들, 정치학자들, 극우당을 제외한 좌우파 정치인들이 특별히 초대된 자리였다.

사상 최악의 참여율

“우리가 이번 선거에서 패한 까닭은 우리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연설의 첫장을 연 스트로스칸이 이번 선거에서 사회당의 패배를 씁쓸하게 자성하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사회당(PS)의 대통령선거후보 리오넬 조스팽이 2차전에 출마하지 못하게 된, 그것도 극우당인 ‘국민전선’(FN)의 후보 르펜에게 밀려난 현실. 그래서 결선에서 극우파에 대항하기 위해 좌파가 우파를 밀어야 하는 전례 없는 정치현실. 결국 프랑스 정치사상사에 기록될 획기적인 사건을 분석하고 토의하는 자리는 씁쓸한 수치심이 감돌았다.


‘나는/우리는 수치스럽다’, ‘극우파는 안 된다’는 구호는 1차선거 직후인 4월21일 밤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방방곡곡에서 터져나오는 시위행렬들의 구호다. 이는 자크 시라크(공화국연합·RPR)와 리오넬 조스팽(사회당·PS)이 결선후보로 당선되리라고 믿었던 예상을 뒤엎고, 시라크(19.88%) 르펜(16.86%) 조스팽(16.18%)이라는 순위의 득표율이 나타난 데 대한 대다수 국민의 반응이기도 하다.

“…청천벽력입니다… 대통령선거 결선이 끝나고 나면 정계를 떠나겠습니다.” 조스팽은 4월21일 3위로 밀려난 것이 확실해졌을 때 공식회견을 통해 사직과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연설문이 울려퍼지는 당사 여기저기에서 당원들이 눈물을 훔쳤다. 날벼락을 맞은 것은 조스팽뿐이 아니었다. 각종 매체에 초대된 사회당 대표의원들도 암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전날까지도 결선을 준비한 의원들을 기다리는 것은 “2차투표에서 누구를 뽑을 것입니까? 시라크에게 표를 던지시겠습니까” 라는 잔인한 질문공세였다. “르펜을 뽑지는 않는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시라크에게 표를 던진다”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망적인 선택”이라며 암담한 현실을 쓴말로 삼키는 의원들도 있었다.

믿어 의심치 않던 조스팽의 1차당선은 왜 실패로 돌아갔을까? 사회당을 비롯한 좌파의 실패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요인들을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제5공화국 대통령선거 1차투표 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과 후보 난립으로 인한 표 분산을 들 수 있다. 1차선거에 최종적으로 등록한 후보는 모두 16명이었다. 시라크가 우파연합에서 절대적으로 제외시키는 극우당 후보가 2명, 우파 대표들이 5명, 극좌와 좌파당 소속이 7명, 중도파가 2명으로 나뉜다. 좌우익 각각이 치밀한 연합전략을 모색해 지나친 표 분산도 방지해야 하는 치열한 선거전이었다.

불참률은 28.40%를 보였는데, 파리는 그보다 높은 29.8%의 불참률을 보였다. 불가피한 이유로 부재시 행사할 수 있는 ‘위임투표율’이 1% 안팎임을 감안할 때, 불참률의 정체는 정치에 대한 실망과 무관심으로 해석된다.

좌파연합의 분열도 주원인

사진/ 결선에 진출한 르펜(왼쪽) 후보와 눈물을 머금고 은퇴한 조스팽. 두 사람은 '두개의 프랑스'를 상징한다. (SYGMA/GAMMA)
조스팽은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한 뒤 1차투표보다는 결선에 대비하여 선거전을 폈다. 시라크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시라크는 늙고 지쳤다”는 발언을 해, “비겁한 인신공격”이라고 정계와 언론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파문에 대하여 조스팽은 “지난 1995년에는 사회당을 대표하기 위해 대통령으로 출마했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출마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1차통과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자세는 그만큼 지난 5년 집권기간에 이뤄놓은 성과를 믿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과신이었고, 과신은 사회당의 발등을 도끼로 찍고 말았다.

게다가 좌파연합의 분열도 심하여, 이번에 5.72%의 득표율로 전체 순위 5위, 좌파 순위 2위를 차지한 극좌당인 노동당 후보 아를레트 라귀에는 줄곧 조스팽 공약의 정체성을 비판해왔다. 지난 5년간 우파 대통령을 수반으로 동거정부를 이끌어온 조스팽의 색채에 대한 비판은 선거전 동안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국민의 관심은 멀어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극우파가 커다란 열매를 맺은 셈이다. “르펜이 당선될 줄 알았으면 투표하는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사회당으로 표를 모으는 건데” 라며 ‘안티르펜’을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뒤늦은 한탄과 후회를 했다.

이제 사회당을 비롯해 좌파연합에 남은 숙제는 6월에 있을 총선에서 같은 실패를 거듭하지 않는 것이다. 조스팽이 은퇴를 선언한 가운데 사회당의 사무총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프랑수아 올랑드(47)가 총선을 지휘할 예정이다. 이미 좌파 승리를 목표로 ‘좌파연합 출마설’이 거론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는 대통령선거의 실패로 좌파당들의 분발이 예상된다. 만약 좌파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프랑스는 또다시 동거정부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한 여론조사(IPSOS)에 의하면 1차선거가 있은 4월의 셋째주에 르펜의 득표율은 월요일에 10%를 조금 넘다가, 금요일에 13%를 넘어섰고, 이틀 뒤 실전에서 16.86%를 기록했다. 모든 여론조사기관들은 시라크와 조스팽 간의 2차전을 예측했다. 선거 직전 좌파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여론조사에서 득표율이 떨어진 조스팽을 지지하며 조스팽과의 특별인터뷰 기사를 싣기도 했지만, 그때도 좌파연합의 우려는 결선이었지 1차투표는 아니었다. 이번 사태를 두고 “여론조사의 악영향”을 들먹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라크-조스팽의 결선을 당연시하며 1차선거를 등한시했다는 분석이다.

이번 1차선거 투표에서 프랑스의 극우파는 르펜이 16.86%, 메그레(MNR)가 2.34%의 득표율을 획득, 거의 20%의 득표율을 기록하고 있다. 즉 프랑스인 5명 중 1명꼴로 극우파에게 표를 던졌다는 얘기다. 극우파는 1995년 선거 때 15%의 적지않은 득표율을 얻긴 했지만 이 같은 상승세에는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르펜을 지지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민생치안(73%)과 이민문제(30%)다. 시라크를 지지하는 이유 중 우선되는 것도 민생치안(53%)이니, 선거의 향방을 가늠한 주요 안건은 무엇보다도 민생치안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인을 위한 프랑스?

사진/ 5월1일 노동절에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반르펜시위를 벌일 예정이며, 르펜도 파리에서 시위할 예정이다. 축구 국가대표팀 마저 반르펜을 외치고 있다. (GAMMA)
민생치안 문제는 프랑스 언론들이 장단 맞추어 떠들어댄 가장 미디어화된 프랑스 사회의 심각한 문제기도 하다. 지난 3월 8명의 사망자를 낸 파리 근교 낭테르의 총기사건은 선거전야에 또 한번 프랑스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여기에 20%의 투표자들이 치안문제의 주요인을 프랑스의 이민자들에게 돌리며 극우파를 선택한 것이다.

선거 직후 <워싱턴포스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단지 미국인들을 싫어할 뿐 아니라, 미국에 관심을 가지는 프랑스인들도 싫어한다.” 극우파를 선택한 프랑스인들을 비난하는 말이다. 시라크와 조스팽이라는 쌍둥이 건물을 르펜이라는 비행기가 공격하여, 조스팽에겐 명중하고 시라크는 한 부분이 불타고 있는 신랄한 시사풍자만화가 <르몽드>를 장식한 것도 같은 취지다.

르펜은 유럽의 공동화폐인 유로를 반대하고 프랑으로의 복귀와 유럽연합 탈퇴를 외친다. 그리고 초강경 이민정책을 내걸었다. 외국인들의 귀화나 정상참작에 의한 체류증 발급을 철저히 금지하고 프랑스인과 결혼한 외국인들에게조차도 극도로 까다로운 절차의 체류방법을 제시한다. 외국인들이 프랑스인의 일을 빼앗아가는(?) 정책은 씨를 말리고, 실업자 외국인은 가차없이 추방한다는 정책이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프랑스인들을 위한 나라”고, “프랑스인이란 유전되는 것”이며 “부모 모두 프랑스인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전쟁·알제리전쟁을 겪었으며 근 50여년간 정치여생의 유일한 소원이 ‘프랑스국가’ 건립인 올해 73살의 늙고 증오로 가득 찬 르펜의 모습이다. “사회적 측면에서 나는 좌익이며, 경제적으로는 우익이고, 국가적으로 나는 바로 프랑스”라며 4월21의 승리를 자화자찬한 그는 2차투표에서 30%의 득표율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진/ 1차투표 결과를 대서특필한 프랑스 신문들. 지진, NON(안돼), 충격, 폭탄 르펜이라는 제목의 1면기사들이 눈에 띈다. (이선주)
5월5일에 있을 결선을 위한 의례적 행사인 ‘후보 1 대 1 TV 토론’을 시라크는 거부했다. 공화국의 적인 극우당 후보와 토론을 벌인다는 것, 아니 접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수치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르펜은 반민주적인 태도라며 시라크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우파는 물론이고 “시라크는 민주화 여정에서 적이지만, 르펜은 공화국의 적이기 때문”에 좌파 의원들도 서둘러 시라크를 찍겠다고 공식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탈락의 충격 때문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조스팽도 4월26일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서는 투표에 참가해야하며, 극우파가 프랑스를 대표할 위험한 가능성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결선에서 시라크가 80% 정도의 득표율을 얻을 것이라는 예측이 유력하다.

파리=이선주 통신원 oseyo@libertysurf.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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