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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성을 구원한 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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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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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피임약 도입한 뒤 불법 낙태시술 현저히 줄어든 브라질

사진/ 브라질 젊은이들의 거리낌 없는 애정 표현. 브라질에서 낙태는 패륜으로 취급된다. (GAMMA)
10여년 전, 필자가 한국을 떠나기 전 본 연속극에서 남편이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가 돼버렸을 때 아내는 임신 초기였다. 친정 아버지가 딸을 찾아와서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를 키우기 힘들 테니 지울 것을 권유하자, 그냥 아이를 낳겠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브라질에서 산 지 몇년이 지나서야 그런 장면이 안방 극장에서 아무 여과 없이 방송될 수 있다는 게 한국만의 정서라는 걸 깨달았다.

브라질의 ‘낙태 히스테리’

현실 중에는 실제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지만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는 다룰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사위가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임신한 딸에게 태아를 없앨 것을 종용하는 아버지는 실제로는 존재할지 몰라도 브라질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등장할 수 없다. 그건 친부모를 죽이는 자식이나, 친딸을 강간하는 아버지가 실제로 존재하지만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다룰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인공유산은 좀 귀찮고 성가시고 비용이 많이 드는 피임의 한 수단이지만, 브라질에서 낙태는 패륜으로 취급된다.


모든 사회는 구성원을 통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윤리와 도덕 체계를 확립한다. ‘억압받는 열등한 성’인 여성에 대한 구속과 제약은 윤리 체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인명경시의 무법상태에 방치되어 있는 브라질이 여성의 낙태에 대해서만은 가톨릭 종교식의 절대적 결벽을 강요하는 것이나 ‘전 국토 어디서든 집 밖 1km 반경에서 성매매를 할 수 있는 나라’인 한국 사회가 순결 이데올로기와 호주제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공유산에 대한 브라질 사회의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운 거부감은 고스란히 여자들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합법적인 낙태시술은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이나 임신을 지속할 경우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 때에 한해서만 허용된다. 그런데 성폭행 당해서 생긴 생명도 엄연한 생명이므로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법개정을 요구하는 여론도 강력하다. 합법적 낙태를 허용하는 위의 두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인공유산을 하러 병원을 찾는 데서부터 힘겨운 악전고투가 시작된다. 정식 면허를 가진 의사와 위생적인 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낙태시술을 해주는 산부인과 병원들은 당국의 단속을 피해 꽁꽁 숨어 있다. 낙태를 둘러싼 침묵의 카르텔이 어찌나 견고하고 엄숙한지 어디다 물어볼 곳도 알아볼 데도 없어 피가 마르다 보면 뱃속의 생명을 없앤다는 죄책감마저 온데간데없어질 정도다. 병원의 위험 부담이 워낙 높기 때문에 시술 비용도 엄청나게 비싸다. 국민 월평균 소득이 300달러 정도인데 낙태 시술비는 1천달러를 호가한다. 당연히 결과는 뒷골목에 무허가 시술소가 난립하고, 제대로 된 시술을 받지 못해 여성 건강이 망가지는 것이다.

99년부터 브라질에서 일반인에게 판매되고 있는 사후피임약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성관계 뒤 72시간 안에 2회에 거쳐 복용함으로써 수정란 착상을 막는 이 피임약은 의사의 진단서 없이 보통 약국에서 7천원 정도에 살 수 있다. 이 약이 막은 ‘원치 않는 임신’은 약 200만건에 이를 것이라고 관련기관에서 추정하고 있다.

공중보건소 통해 무료 배포

낙태시술로 인한 후유증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는 환자 수도 격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90년대 초반의 통계가 매년 35만명이었는데 2000년에는 23만명으로 줄어들었고 낙태의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80명에서 28명으로 내려갔다. 세계보건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80년대에 브라질에서는 1년에 약 400만건의 낙태시술이 행해졌다. 2000년에 들어와 이 수는 70만에서 100만건 사이로 크게 감소했다.

의료 서비스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저소득층 여성 사이에서는 특히 공중보건소를 통한 사후피임약의 무료 배포와 이용법 안내가 주효했다. 보건당국에서는 보건소 홍보 활동 덕분에 약 30%까지 낙태시술이 줄었다고 보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적절한 의료정책의 시행이 이룬 성과’라는 표현은 이런 일을 가리킬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닐까. 낙태는 여성에게 길고 쓰라린 후유증을 남기는 고달픈 경험이다. 이를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의술은 마땅히 환영받아야 한다.

상파울루=오진영 통신원 ohnong@ig.com.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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