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제네바에서 쏘아올린 ‘양심’

407
등록 : 2002-05-02 00:00 수정 :

크게 작게

유엔인권위원회 양심적 병역거부 결의안 통과… 한국은 ‘모범사례’ 보고할 수 있을까

사진/ 유엔인권위 회의장 전경. 이번 결의안은 국가인권위와 인권 NGO의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이번 결의안을 표결 없이 전원합의로 통과시킬 것을 요청합니다.” 크로아티아 정부 대표의 요청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그러자 의장은 곧 의사봉을 두드리며 만장일치 통과를 선언한다.

지난 4월23일, 제네바에서 열린 제58차 유엔인권위원회 회의장에서 벌어진 불과 2∼3분에 걸친 짧은 순간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을 위해 지난 2년간, 특히 이번 유엔인권위 기간 중 밤을 새우며 노력해온 한국과 국제 인권 비정부기구(NGO)의 여러 활동가들에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현장에서 이 장면을 지켜본 몇몇 인권 NGO 활동가들은 안도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국가위원회의 참여 강조


이번 결의안은 형식적으로는 제안국 크로아티아 정부를 비롯한 10여개 유럽 국가의 주도로 이뤄낸 성과지만, 내용 면에서는 인권 NGO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즉 일부 친인권 국가와 인권 NGO의 합작품인 셈이다.

크로아티아 정부 관계자는 결의안 채택 직후에 이번 결의안의 중요성에 대해 물어보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이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이나 대체복무제 도입과 관련한 모범사례를 모아 분석하는 보고서 작성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핵심”이며 모든 국가에게 “양심적 병역거부권과 관련한 자국 내 현행법과 관행을 국제인권기준에 비추어 검토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NGO 자격으로 결의안 초안 작성에 참여한 퀘이커교인이자 인권학 교수인 레이첼 브레트씨는 “지난해와 비교하여 주목할 부분은 다음 회기 보고서 작성에 국가인권위원회의 참여를 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2000년 결의안에 따라 인권 고등판무관실이 올해 처음 유엔인권위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약 180개가 넘는 유엔 회원국가 중 11개 국가만이 자료를 제출했다. 이런 추세라면 다음 회기에도 충실한 보고서를 만들기가 어렵다”며 이번 결의안은 “국가인권위와 인권 NGO의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 부분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에도 중요한 전략적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모범사례를 모아 제출할 것을 요청하는 2000년 결의안에 찬성했지만 아무런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정부의 한 관계자는 “모범사례가 없어 보낼 내용이 없었다”는 극히 간명한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당연히 이번 보고서에는 한국 상황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결의안에 국가인권위가 포함됨으로써 다음 보고서에는 한국 정부가 협조를 하지 않더라도 국가인권위를 통해 공식절차를 밟아 한국의 실태를 유엔에 알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지난 1987년 유엔인권위에서 처음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다른 인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는 의제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의 ‘마그나 카르타’로 알려진 1998년 결의안과 이의 후속인 2000년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최근에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지, 한국에서도 오태양씨 사건을 계기로 최근에 급격히 공론화되기 시작했고 마침 지난해에 유엔의 NGO 협의자격을 획득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유엔인권위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따라서 예년에는 국제 인권 NGO 활동가 서너명이 모여 하던 일을 이번에는 퀘이커교, 국제반전단체(WRI), 국제화해친교연합(IFOR), 팍스로마나 등의 국제 NGO에 국내에서는 민변이 가세하여 10여명으로 구성된 ‘다국적 로비팀’이 구성되었다.

국내 상황의 특수성?

사진/ 한국의 NGO대표단. 2004년 유엔인권위에 제추할 보고서에서 한국의 '모범사례'를 볼 수 있을까.
지난 10여년간 이 문제로 씨름해온 국제화해친교연합의 조나단 시손씨는 “1600여명이 넘는 엄청난, 아마도 세계 최대의 병역거부 양심수를 보유한 한국의 인권 NGO가 이제야 유엔인권위에 참여한 것은 뒤늦은 감이 있다”며 “그럼에도 한국 NGO의 참여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 국한한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임을 확인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며 한국 인권 NGO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표시했다.

한국에서 민변과 인권평화연대 회원으로 구성된 다섯명의 인권 NGO 대표단 단장격인 이석태 변호사는 “약 10일간의 제네바 체류기간에 유엔, 정부, NGO 등 한국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문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을 만났고 모든 모임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아시아 인권 NGO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민변의 오재창 변호사는 한국 NGO를 대표해 말레이시아의 국가보안법 피해자를 위한 하루 지지단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표단은 튀니지 출신의 종교와 신념의 자유(과거에는 종교적 불관용)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 아모르씨를 만나서 한국 방문을 적극 요청하였고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보고서 작성자를 만나서는 이번 보고서의 미흡한 점, 향후 개선점과 협력에 대해 논의했다. 이보다 앞서 4월3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주제로 열린 NGO 토론회에서 이석태 변호사는 현재 감옥에 있는 1640여명의 이름이 담긴 50여쪽의 영문자료집과 전단을 중심으로 한국의 상황에 대해 발표했다. 한편 주제네바 대표부 대사의 초청으로 열린 간담회에서 대표단은 한국 정부가 아모르 특별보고관의 한국 방문과 결의안 통과에 협조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민변은 유엔인권위에서의 NGO 구두발언에서는 한국 정부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인권침해를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들을 사면해 즉각 석방할 것, 그리고 대체복무제를 도입함으로써 이들을 범죄인으로 만드는 것을 중단하고 감옥과 사회생활에서 겪는 모든 차별관행을 조속히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위헌심사 요청이 계류 중이다”는 이유를 들어 명확한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대신 “양심의 자유에 관한 모든 사람의 권리를 완변히 보장하고 있으나 한반도의 특수한 안보상황으로 인해 의무복무제 및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다”며 국내 상황의 특수성을 주된 이유로 제시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강변하던 논리가 다시 등장한 셈이다.

1640명의 양심수에게 희망을

이에 대해 한 인권전문가는 “보편적으로 인정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국제인권법이 아닌 국내법 문제로 환원해 책임을 모면하고자 하는 방어적인 대응”이라고 지적했다. 어쨌든 한국 정부는 올해 결의안에 찬성했다. 한국 정부가 ‘양심’(良心)에 따라 결의안에 찬성했는지 아니면 유엔에서는 찬성하고 국내에서는 이를 무시하려는 ‘두 마음’(兩心)에서 찬성했는지 아직 속단하기 이르다.

결국 한국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문제는 제네바를 거쳐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결의안 통과 소식을 국내에서 전해들은 NGO 대표단의 일원은 “비록 한쪽 분량에 불과한 작은 문서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보편적으로 인정된 인권인 줄도 모르고 ‘죄인’이 된 약 1640명의 양심수에게, 그리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한국의 인권활동가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과연 2004년 유엔인권위에 제출할 보고서에서 한국의 ‘모범사례’를 볼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헌법재판소가 국제인권기준에 걸맞은 ‘모범답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글·사진 제네바=이성훈 통신원 almolee@yahoo.com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