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마지막 빨치산의 증언(2)
그리스 빨치산 여장부 자벨레나의 치열한 투쟁과 기나긴 영욕의 세월
“한번은 200여명의 나치병사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빨치산 수는 20명 정도로 역부족이었다. 주위에 있는 모든 대원들이 하나둘 쓰러지면서 나중에는 혼자가 됐다. 나치병사들이 조금씩 나를 포위해왔다. 혼자 총을 쏘면서 뒤로 물러나다가 벼랑 위에 다다랐다.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단지 나치군에 잡히지 않기 위해 벼랑 아래로 뛰어내린 뒤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떨어지면서 몸이 나무 위에 걸렸다. 곧이어 나치군에 반격을 개시한 그리스 빨치산들이 절벽 아래의 나무 위에서 바람에 휘날리던 나의 붉은 드레스 자락을 보고 구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너무나 끝없이 이어지는 자벨레나의 무용담에 필자가 제동을 걸어야 할 정도였다. 지금도 여전히 빨치산 시절을 살아가는 듯 벽 한가운데는 빨치산이던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걸어두었다.
추격 받자 벼랑 아래로 몸을 던져
결혼한 지 석달 만에 자벨레나는 남편과 함께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다. 당시 레프카다섬의 빨치산 부대에서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후방에 남아 남자대원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기보다는 언제나 최전방에서 수류탄과 총을 들고 싸웠기 때문에 남자대원들까지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독일군 사이에서도 그의 ‘악명’이 높아졌고, 나중에는 그의 목에 엄청난 상금까지 걸었다. 더구나 그는 레프카다섬에서 최고의 미인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전장에서는 언제나 최전방에서 싸웠기 때문에 남자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나중에는 그의 맹활약을 듣고 많은 젊은이들이 빨치산에 합류해오기도 했다. 남자 빨치산들은 “여자도 앞에서 싸우는데 어떻게 남자가 도망을 가느냐”면서 자벨리나를 영웅으로 떠받들 정도였다. 나중에는 그에게 빨치산 대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해오기도 했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대장의 책임은 너무 무겁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좀더 자유롭고 싶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거절 이유였다.
빨치산들은 산에서 생활하다 마을로 내려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마을 사람들은 빨치산들에게 머물 숙소와 음식물을 제공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빨치산들의 활동을 지지했으나 그 중에서 몇명은 배반하여 독일군에 빨치산과 관련한 정보를 제공했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독일 나치처럼 행동했다. 그는 “당시 나치 협력자들은 나치군복까지 입고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 또한 나치 협력자들은 독일나치가 물러나자마자 영국군을 불러들여 빨치산을 잡아들이는 데 혈안이 됐다”고 기억한다. 물론 그는 지금도 자신을 죽이려 한 나치 협력자들을 모두 기억하는 듯했다.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자신을 치료한 의사도 사실은 나치 협력자였으나 빨치산의 보복이 두려웠든지 그를 나치에 고발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치가 그리스에서 물러난 뒤 셀 수 없이 많은 전투로 지친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조용하게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바로 현상수배였다. 비록 나치가 물러나고 그리스가 해방됐지만 다시 공산주의자란 죄목으로 수배당해야 했다. 물론 수배된 상황에서도 우익과의 싸움은 계속됐다. 당시 우익진영은 나치에 협력한 자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전력을 낱낱이 알고 있던 빨치산들을 무자비하게 대했다. 빨치산들을 처단하는 문제는 우익진영의 생사가 걸린 문제기도 했다. 어쨌든 자벨리나는 “같은 민족끼리 싸웠다는 게 부끄럽다”면서 내전에 관한 얘기를 피해나가려고 했다. “나치군과 나치 협력자들에 대항하여 싸운 일차내전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의 투쟁이었지만, 같은 민족끼리 싸운 이차내전은 엄청난 고통이었다”고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우익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좌익 빨치산들은 하나둘 모두 총살되거나 투옥되었다. 1947년 7월 숨어 지내던 자벨리나에게 공산당은 “이미 정부와 얘기가 됐으니 지금 자수하면 자유의 몸으로 풀어준다”면서 자수할 것을 권유했다. 이 대목을 얘기하면서 자벨리나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 있던 많은 빨치산들은 자유를 준다는 말을 믿고 자수했다고 한다. 자벨리나도 그때 자수했으나 자수는 바로 체포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자벨레나는 옥중 삶을 살게 된다. 당시 우익정부가 공산당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투옥된 즉시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 뒤 날마다 총살당하는 악몽에 시달리면서 지냈다. 기약 없는 감옥생활, 언제 사형을 집행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형수의 삶은 그를 갉아먹었다. 하지만 유능한 그녀의 변호사와 가족은 각처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항고와 상고를 통해 그의 구명운동을 지속해나갔다. 변호사와 가족들의 구명운동은 효과적이어서 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계속 연기됐다.
“옥중의 삶은 말하고 싶지 않다”
그가 지내던 교도소에는 100여명의 여자 빨치산들을 함께 수용했다고 한다. 그는 단지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는 삶이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교도소 생활에 대해서는 말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그가 갇힌 지 10년이 지나면서 정치적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10년을 복역한 뒤 마침내 군 고위직에 있던 오빠의 보증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는 다른 빨치산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정보기관의 사찰을 받아야만 했고 군부독재가 끝나는 1974년이 돼서야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됐다. 감옥에서 나온 뒤 자벨레나는 귀향의 길을 택하기보다는 아테네로 와서 정착했다. 자신의 ‘화려한 과거’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그는 아테네에서 공장노동자로 살면서 생계를 해결하는 한편, 거의 은둔하다시피 하면서 지냈다. 지금까지도 섬사람들과는 완전히 연락을 끊고 살아왔기 때문에 레프카다섬에서는 그가 오래 전에 죽은 것으로 돼 있다.
힘든 인터뷰였다. 특히 자벨레나처럼 한이 많은 사람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건 고문이라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자벨레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몇번이나 휴식을 요청했다. 막상 물어보고 있는 필자가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분위기가 바뀐 것은 80살의 자벨레나가 벽에 걸린 자신의 초상화를 떼내어 보이면서 “젊었을 때는 굉장히 아름다웠다”는 말을 수줍게 하면서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삶을 정리한 듯 “완전히 충만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나의 생에 감사한다”는 말을 빼먹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 youngsig@otenet.gr

사진/ 유명한 빨치산 자벨리나를 그린 초상화. 그는 젊은 시절 레프카다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사진/ 빨치산 투쟁을 회고하는 자벨리나. 힘든 세월을 겪었음에도 자신이 충만한 삶을 살아왔고, 이를 감사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