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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전쟁? 바밍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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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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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와 조작의 기술자들, 서구 주류언론의 기묘하고 능숙한 프로파간다

99년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일방적인 나토 공격을 마땅히 ‘침략’‘침공’이라고 해야 했지만, 그러한 용어를 서구 주류언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 SYGMA)
러시아에 가거나 러시아 친지들을 만날 때마다, 필자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새삼 놀라게 된다. 공산당 독재 시절 어용매체에 대해서 늘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지식인들이, 국제뉴스에 관한 한 현재의 주류매체 보도를 거의 그대로 믿고 따른다는 것이다. 20년 전 옛소련 군대가 처음 아프가니스탄의 ‘사막화’를 시작했을 때, 그 지식인들은 소련 침략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 밤을 세워 서양 라디오 방송을 듣는 데에 매진하곤 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이 이미 사막과 거의 다름이 없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괴뢰정부를 세우고 빨치산 토벌에 나서는 등 옛소련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때, 그들은 대개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적극적인 반대 의식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고성능 폭탄과 순항 미사일 못잖은…

현재 ·의 권위를 내세우는 외제 프로파간다는 옛날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성공을 거두고 있다. 가끔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괴한 상황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체첸에서의 인권침해 실태를 고발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메모리알’(Memorial · www.memorial.ru)이라는 러시아 굴지의 인권단체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 개시에 즈음해서 ‘대테러 전쟁 지지 선언서’까지 내기에 이르렀다. 이유가 무엇일까? 옛소련의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갖가지 조작과 거짓들을 그토록 잘 꿰뚫었던 사람들이 왜 외국의 <프라우다>들-<더 타임스The Times>·<파이낸셜 타임스>(The Financial Times)과 같은 보수적인 일간지 - 앞에서는 그 정도로 비판의식을 잃는 것인가?


물론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서구·미국계통의 회사와 구미계통 재단, 세계 핵심부의 연구·교육기관 등에게 취직하여 지원금·연구비 따내기, 연구협력 등의 크고 작은 일에 의존해야만 하는 주변부 지식인의 사회·경제적인 상황부터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위에서 언급한 ‘메모리알’은 미국의 주요 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정권과 충돌할 때마다 미국 신문에서의 ‘지원 사격’에 힘입기도 한다. 물론 서구·미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한다고 해서 서양의 침략주의를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법이 없다. 그러나 생계 곤란에서 구제해주는 서구·미국의 ‘은인’들의 전체적인 세계관, 국제정치의 이해방식을 전적으로 무시하기가 힘든 것도 현실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서구를 전통적으로 ‘문명의 발상지’ ‘근대 문물의 근원지역’으로 인식해온 러시아 식자층의 고질적인 사대주의를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무엇보다 주목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는, 구미 지역 주류매체 자체의 고도의 교묘함이다. <프라우다>의 촌스러운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중립성과 객관성으로 일컬어지는 주류 매체야말로 고성능 폭탄과 순항미사일 못지않게 서양 제국주의의 ‘전략적인 무기’에 해당한다.

노엄 촘스키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합의의 조작’의 기술을 몇 가지의 주요 수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배경 무시’라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 침략 대상이 된 비(非)서구지역의 역사·문화를, 서구 중심적인 일반 교육과정에서 배울 기회는 거의 없다. 예컨대 이라크를 식민화해서 자연자원을 착취한 영국이 1920∼30년대에 ‘아랍인 폭동’(독립운동)을 진압할 때 세계 사상 최초의 민간인 거주지역의 대량 폭격과 화학무기 사용이라는 ‘신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안다면, 걸프전쟁과 지금 준비 중인 미국의 새로운 이라크 침략을 제국주의 역사와 연결시켜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사실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와의 전쟁준비를 당연한 일처럼 보도하는 구미의 주류 방송사나 신문들이, 현대 이라크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할 리가 없다. 결국 서구 중심적인 교육과 제국주의 합리화에 혈안이 된 매체들의 협력이 하나의 ‘시너지(synergy) 효과’를 내는 데 성공한 셈이다.

무가베에 대한 맹목적 공격

폭격에 넋이 나간 이 아프가니스탄 소년에게 “이건 폭격이 아니라 바밍 캠페인”이라고 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진/ GAMMA)
둘째는 ‘전후 문맥 무시’라는 수법이 널리 쓰인다. 예를 들면 3월 중순에 열린 짐바브웨(Zimbabwe)라는 작은 아프리카 국가에서의 부정선거가 서양 주류언론의 집중 사격대상이 됐다. 그러나 짐바브웨의 선거문제를 그토록 예리하게 밝히는 서방언론들이, 왜 콩고 같은 짐바브웨 주변국가의 선거문제는 보도하지 않는가? 콩고민주공화국의 현재 최고 통치자인 조지프 카빌라가 아예 어떤 선거형식도 거치지 않고 최고의 권력을 피살된 아버지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음으로써 부정선거를 비판할 여지조차 없다. 그러나 중세적인 냄새를 풍기는 권력세습이라면, 오히려 ‘민주적인’ 서양언론의 비난을 사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그 어떤 선거형식도 거치지 않고 콩고민주공화국을 지배하고 있는 조제프 카빌라. 그러나 서구 언론의 관심 밖에 있다. (사진/ GAMMA)
콩고의 독재자인 카빌라는 그 나라의 자원을 착취하는 서방의 광산재벌과 ‘밀월관계’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짐바브웨의 반(半)독재자인 무가베는 총 경작지의 70%를 상회하는 백인들의 농장을 흑인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다. 그래서 남아공을 제외한 아프리카 서남부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재·반(半)독재 정권에 의해서 통치된다는 문맥이 서양의 언론에서 전면적으로 무시되고, 해당 지역에서의 가장 개방적인 정치문화를 가진 짐바브웨의 문제들만 늘 부각하는 것이다. 서양 일각의 진보매체마저도 아프리카 서남부 현실의 전후문맥을 무시하는 무가베에 대한 맹목적인 공격에 참여하고 있다.

셋째, 서방의 ‘주류’언론은 독자·시청자로 하여금 미국 등 서방정부들의 정책과 자신을 동일시하게끔 용어를 아주 교묘하게 이용한다. 예를 들면 1999년에 2천명이 넘는 세르비아 민간인들을 죽인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서양언론에서는 늘 ‘전쟁’이 아닌 ‘바밍 캠페인’(bombing campaign)이라고 했다.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캠페인이라면 선거 캠페인쯤을 생각하는 서양 일반인으로서 어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실제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일방적인 나토 공격을 마땅히 ‘침략’ ‘침공’이라고 해야 했지만, 그러한 용어를 주류언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침공과 탈레반 소탕작전 역시 ‘반테러 캠페인’이라고 한다. 이라크에 대한 침공을 미국이 시작하면, 그것도 사담 후세인 정권 타도를 위한 ‘캠페인’쯤으로 부르지 않을까 싶다.

‘캠페인’이라는 말을 듣거나 읽을 때, 폭격·기아로 죽은 유고슬라비아·아프가니스탄·이라크 어린이들의 얼굴들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서양언론으로서 참 ‘편한’ 점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관련된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폭력의 악순환’과 같은 용어가 늘 쓰인다. 팔레스타인 지구를 불법점령하는 이스라엘의 탄압과, 팔레스타인의 해방투쟁은 동질의 ‘폭력’인가?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점령한 파시스트 독일의 탄압과 프랑스의 저항운동인 반(反)파시스트 투쟁도 똑같이 ‘폭력’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방의 주요 방송사·신문사 기자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쪽의 행위를 똑같은 ‘폭력’으로 기술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라크 변경 폭격, 왜 안 싣나

물론 위의 3가지 수법 이외에 서양언론들은 ‘거친’ 방법들을 쓰기도 한다. ‘불필요한’ 정보를 아예 싣지 않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예를 들면 최근에도 미국·영국 폭격기들이 이라크의 변경지역들을 정기적으로 폭격한다는 사실을 주류 일간지에서 과연 읽을 수 있는가? 확인불가능한 정보의 자의적인 이용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이라크·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의 생산’을 들먹이는 미국의 언론들은 근거가 불확실한 자국 정보기관의 자료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이용한다. 그러나 ‘거친’ 방법을 쓰지 않는 고급 일간지라고 해도 위에서 언급한 3가지 교묘한 수법들을 쓰는 것은 예사다. 주로 보수진영에 속하는 ‘주류’매체들의 대주주·광고주들의 보도방향에의 영향 행사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프로파간다의 허구성을 과거에 꿰뚫어봤음에도 현재 서양 ‘주류’매체가 과시하는 정보 능력과 ‘중립성’ ‘객관성’에 빠져 교묘한 기만성을 놓치는 러시아 지식인들을 보기가 실로 안타깝다.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의 공급에서 독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일방적인 의존성을 면치 못한다면 과연 ‘자유인’의 칭호를 들을 수 있는가? 늘 ‘주류’를 의심하고 ‘주변’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외신의 ‘세계적인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일 것이다.

박노자ㅣ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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