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마지막 빨치산의 증언(1)
팔순의 노인이 된 그리스 빨치산의 회고담… 30년 옥살이가 남긴 고통의 흔적들
1944년 10월12일, 독일 나치로부터 그리스가 해방되자 연합국으로부터 군사통치를 위임받은 영국은 좌파게릴라 부대였던 엘라스 부대를 불법화하고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리스 빨치산들은 무장해제를 거부했고, 1944년 12월3일에 첫번째 내전이 일어났다. 2달간 지속된 내전에서 좌파게릴라들은 패배를 자인하고 발키자합의(좌파의 무장해제)에 서명한다. 그러나 당시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던 공산당은 영국의 군정과 그리스 왕당파의 압력과 박해에 맞서 1946년에 다시 무장봉기를 하게 된다. 2차 내전은 그리스인들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하며 수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1949년 그리스 공산당 산하의 ‘민주부대’가 진압되면서 내전은 막을 내렸지만 수만명의 빨치산 대원들은 다른 이웃 공산국가나 소련으로 망명했다. 반면 그리스에서 살아남은 빨치산 대원들은 모두 투옥되거나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빨치산 출신들에 대한 보호감호는 1974년 군부독재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지금은 팔순 노인이 된 ‘왕년의 빨치산 전사들’이 증언한 보호감호와 잔학한 고문, 사상전향 공작 등은 지구의 반대편인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이 자행된 일이었다.
81살의 마리노스 마시니는 철학교수인 지금의 아내와 늦게 결혼한 탓에 지금도 17살, 15살의 두 고등학생 아들들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필자의 방문은 그의 평안하던 일상생활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잊을 만하면 누군가가 다시 옛날 일을 끄집어내어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놓는다”는 우스갯소리. 자신의 빨치산 행적에 대해 얘기를 꺼내자마자 어느덧 젊은 빨치산 전사로 되돌아갔다. 아직도 쌓인 한을 씻어버리지 못한 듯 말을 중단하고는 한참 한숨만 내쉬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를 반복했다. 총을 들었던 빨치산 전사. 수십년의 옥고를 겪은 그의 삶 속에 내재된 고통의 강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인간의 삶을 단 몇 시간 만에 얘기한다는 것이 엄청난 모순임을 필자가 그 순간만큼 절박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발가락 부러뜨려 신발을 신기고… 마시니는 1921년 류카스라는 작은 섬에 살던 부농의 집안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과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미국으로 떠났다. 남겨진 네 남매를 돌보는 일은 자연히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집안형편으로 인해 병에 걸린 두 여동생들은 병원치료조차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던 마시니도 학업을 포기하고 인쇄소 일을 통해서 자신의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했다. 당시 열다섯살이던 마시니의 고혈을 짜내는 노동조건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다. 아주 낮은 임금에 일요일이 되면 2시간의 휴식시간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일하던 인쇄소의 주인은 나날이 부유해져갔지만 그는 멈출 수 없는 기계가 되어갔다. 그는 “지금도 누군가가 내게 왜 공산주의자가 됐느냐고 묻는다면 ‘인생’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고 두세번 반복해서 말했다. 2차대전 중 마시니가 살던 류카스는 이탈리아군에 의해 점령됐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독일 나치의 꼭두각시 메탁사 정부가 그리스 청년들을 반강제적으로 징집하여 전선으로 보내고 있었다. 당시 열아홉살이었던 마시니는 군대에 자원해서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날마다 경찰의 심문에 시달려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독일 나치군이나 이탈리아 파시스트군의 일원이 되든지, 아니면 산으로 들어가서 적들과 맞서 싸우든지….” 1942년 같은 처지에 있던 수십명의 청년들과 마시니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군과 독일 나치군을 상대로 무장항쟁을 벌이던 공산당의 빨치산 부대 ‘민족해방전선’이 류카스로 들어오자 당장 이 조직에 합류했다. 빨치산 전사가 된 마시니는 섬의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갖고 다른 대원들과 함께 이탈리아 파시스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죄의식에 시달리는 듯 전투 중 두명의 이탈리아 군인들을 사살했음을 고백했다. 또한 당시의 전투에서 많은 이탈리아 군인들이 죽었으나 보복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일은 없었다면서 만약에 독일 나치군이 그만한 희생을 당했으면 섬 전체를 초토화시켰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탈리아 파시스트군이 물러나고 독일군이 들어오면서 전투는 본격화됐다. 그리스 빨치산의 피해도 엄청나게 늘어갔다. 류카스에서만 수백명의 빨치산 대원들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잔인한 나치군은 마을 사람들 중 산으로 간 빨치산의 일원이 있는 가족들을 괴롭혔다. 만약 빨치산 부대원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 가차없이 처형했다. 어쨌든 전투로 단련된 류카스섬의 빨치산 부대는 케팔로니아섬을 정복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그동안 마시니도 3년의 경력이 쌓이면서 중대장으로 진급하고 케팔로니아섬에 주둔하던 빨치산 부대 지도부의 일원이 되면서 신문발행을 책임진 편집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그가 발행하던 신문 제호는 <민중의 항쟁>이었다. 1944년 12월, 그리스 빨치산들의 강력한 저항과 연합군의 공격으로 나치군이 그리스에서 후퇴하고 대신 영국군이 들어온다. 그리스에서 군정을 선포한 영국군은 빨치산 부대의 해체와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 그리스 좌파와 충돌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빨치산 부대는 우수한 무기를 보유한 영국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두달 만에 발키자에서 빨치산의 대표가 영국군이 제안한 무장해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아테네를 제외한 산악지역이나 섬지역에서는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당시 케팔로니아에 있던 마시니가 속한 빨치산 부대 역시 발키자합의를 거부하고 계속 무장한 상태로 섬을 지키고 있었다. 귀환한 국왕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우파가 좌파를 박해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우파와 좌파의 갈등은 다시 심각해지고 1946년 전면적인 내전이 시작됐다. 케팔로니아에서 신문을 발행하던 마시니는 우익정부군에 의해 체포되고 좌익신문을 발간했다는 이유로 2년 징역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2년 징역형으로 시작된 옥살이는 거의 30년 동안 지속됐다. 체포된 뒤 그리스 전역에 흩어져 있던 감옥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닌 바람에 가보지 않은 감옥이 없을 정도다. 교도소에서 자행된 잔인한 고문의 상처는 5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매일 몽둥이로 발바닥을 맞는 바람에 발이 부어서 제대로 신발을 신을 수 없을 정도였죠. 하루는 적십자에서 교도소의 인권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방문한다는 통지가 있자, 신발을 신지 못하는 내 발에 강제로 신발을 신기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대로 발이 들어가지 않자 내 발가락들을 부러뜨린 다음 신발 속에 강제로 집어넣었죠.” 양말을 벗고 부러진 발가락을 보여주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빨갱이라고 어떻게 성한 발가락들을 부러뜨리면서까지 신발을 신기려 했을까요?” 지금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푸념이다. “자존심을 지켰기에 자랑스럽다”
무엇보다도 교도소 내에서 그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갈가리 찢어놓은 건 바로 사상전향 공작이었다. “하루는 보안부대원이 와서는 더 이상 공산주의를 믿지 않는다는 서류에 서명만 하면 석방해주겠다는 거예요. 내가 강력하게 거부하자 여섯명의 경찰들이 달려들어 나를 거꾸로 들어올리더니 내 머리를 계단의 콘크리트 바닥에 쿵쿵 내리찍으면서 내려갔어요.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동료들의 시체였죠. 당시 사상전향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어요. 다른 섬(마크로니소스)의 사상범 수용소로 옮긴 뒤 수용소 쪽은 사상전향서에 서명한 사람들과 하지 않은 사람들을 더욱 심하게 차별했어요. 서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중노동과 고문이 뒤따랐습니다.” 마시니는 이곳에서 2년을 보냈는데 “수천명의 수감자들 중 수백명의 사상범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감생활 중 10년 이상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빨치산 대원이었다는 이유로 지속됐던 마시니에 대한 보호감호는 군부독재가 끝나는 1974년 말에 완전히 끝나게 된다. 필자와의 대화가 끝난 뒤 정부에서 수여한 메달과 레지스탕스 카드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그의 눈길은 한동안 넋을 잃은 듯했다. 마지막 질문으로 ‘살아온 생에 대한 후회는 없는지’를 물어봤다. 노전사는 “자존심을 지켰기에 자랑스럽다”는 말을 남겼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 youngsig@otenet.gr

사진/ 케팔로니아섬에서 동료 빨치산 대원들과 서 있는 마시니(맨 오른쪽). 그는 이 섬에서 우익정부군에 의해 체포돼 30여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발가락 부러뜨려 신발을 신기고… 마시니는 1921년 류카스라는 작은 섬에 살던 부농의 집안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과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미국으로 떠났다. 남겨진 네 남매를 돌보는 일은 자연히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집안형편으로 인해 병에 걸린 두 여동생들은 병원치료조차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던 마시니도 학업을 포기하고 인쇄소 일을 통해서 자신의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했다. 당시 열다섯살이던 마시니의 고혈을 짜내는 노동조건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다. 아주 낮은 임금에 일요일이 되면 2시간의 휴식시간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일하던 인쇄소의 주인은 나날이 부유해져갔지만 그는 멈출 수 없는 기계가 되어갔다. 그는 “지금도 누군가가 내게 왜 공산주의자가 됐느냐고 묻는다면 ‘인생’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고 두세번 반복해서 말했다. 2차대전 중 마시니가 살던 류카스는 이탈리아군에 의해 점령됐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독일 나치의 꼭두각시 메탁사 정부가 그리스 청년들을 반강제적으로 징집하여 전선으로 보내고 있었다. 당시 열아홉살이었던 마시니는 군대에 자원해서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날마다 경찰의 심문에 시달려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독일 나치군이나 이탈리아 파시스트군의 일원이 되든지, 아니면 산으로 들어가서 적들과 맞서 싸우든지….” 1942년 같은 처지에 있던 수십명의 청년들과 마시니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군과 독일 나치군을 상대로 무장항쟁을 벌이던 공산당의 빨치산 부대 ‘민족해방전선’이 류카스로 들어오자 당장 이 조직에 합류했다. 빨치산 전사가 된 마시니는 섬의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갖고 다른 대원들과 함께 이탈리아 파시스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죄의식에 시달리는 듯 전투 중 두명의 이탈리아 군인들을 사살했음을 고백했다. 또한 당시의 전투에서 많은 이탈리아 군인들이 죽었으나 보복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일은 없었다면서 만약에 독일 나치군이 그만한 희생을 당했으면 섬 전체를 초토화시켰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탈리아 파시스트군이 물러나고 독일군이 들어오면서 전투는 본격화됐다. 그리스 빨치산의 피해도 엄청나게 늘어갔다. 류카스에서만 수백명의 빨치산 대원들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잔인한 나치군은 마을 사람들 중 산으로 간 빨치산의 일원이 있는 가족들을 괴롭혔다. 만약 빨치산 부대원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 가차없이 처형했다. 어쨌든 전투로 단련된 류카스섬의 빨치산 부대는 케팔로니아섬을 정복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그동안 마시니도 3년의 경력이 쌓이면서 중대장으로 진급하고 케팔로니아섬에 주둔하던 빨치산 부대 지도부의 일원이 되면서 신문발행을 책임진 편집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그가 발행하던 신문 제호는 <민중의 항쟁>이었다. 1944년 12월, 그리스 빨치산들의 강력한 저항과 연합군의 공격으로 나치군이 그리스에서 후퇴하고 대신 영국군이 들어온다. 그리스에서 군정을 선포한 영국군은 빨치산 부대의 해체와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 그리스 좌파와 충돌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빨치산 부대는 우수한 무기를 보유한 영국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두달 만에 발키자에서 빨치산의 대표가 영국군이 제안한 무장해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아테네를 제외한 산악지역이나 섬지역에서는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당시 케팔로니아에 있던 마시니가 속한 빨치산 부대 역시 발키자합의를 거부하고 계속 무장한 상태로 섬을 지키고 있었다. 귀환한 국왕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우파가 좌파를 박해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우파와 좌파의 갈등은 다시 심각해지고 1946년 전면적인 내전이 시작됐다. 케팔로니아에서 신문을 발행하던 마시니는 우익정부군에 의해 체포되고 좌익신문을 발간했다는 이유로 2년 징역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2년 징역형으로 시작된 옥살이는 거의 30년 동안 지속됐다. 체포된 뒤 그리스 전역에 흩어져 있던 감옥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닌 바람에 가보지 않은 감옥이 없을 정도다. 교도소에서 자행된 잔인한 고문의 상처는 5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매일 몽둥이로 발바닥을 맞는 바람에 발이 부어서 제대로 신발을 신을 수 없을 정도였죠. 하루는 적십자에서 교도소의 인권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방문한다는 통지가 있자, 신발을 신지 못하는 내 발에 강제로 신발을 신기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대로 발이 들어가지 않자 내 발가락들을 부러뜨린 다음 신발 속에 강제로 집어넣었죠.” 양말을 벗고 부러진 발가락을 보여주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빨갱이라고 어떻게 성한 발가락들을 부러뜨리면서까지 신발을 신기려 했을까요?” 지금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푸념이다. “자존심을 지켰기에 자랑스럽다”

사진/ 마시니에 대한 보호감호는 1974년 말에 완전히 끝났다. 정부에서 수여한 메달과 레지스탕스 카드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그의 눈길엔 회한이 배어 있었다. (하영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