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일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인 요르단강 서안 도시 나블루스 인근 마을에서 한 팔레스타인 주민(가운데)이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국제법상 불법인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항의하는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나크바 : 팔레스타인인들이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을 일컫는 말로 ‘대재앙’이란 뜻1948년 5월14일 오후, 지중해 연안의 고도 텔아비브. 열정적 시오니스트(유대 민족주의자)이자 이스라엘 초대 총리인 다비드 벤구리온이 유대인 지도자들 앞에서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되던 바로 그날이었다. 앞서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 결의안에 따라,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의 집과 땅을 몰수했다. 아랍계 주민들에겐 테러를 자행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의 절반이 넘는 70만~80만 명이 불과 몇 달 새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 신세가 됐다. 문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이스라엘 건국을 팔레스타인이 ‘나크바’(대재앙)라고 부르는 이유다.
법안 통과되면 팔레스타인 자치 영토 30% 흡수꼭 72년이 흐른 2020년 봄, 팔레스타인에는 또 다른 나크바의 시한폭탄이 재깍거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수많은 유대인 정착촌을 자국 영토로 합병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는 탓이다. 이르면 7월1일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에 법안이 제출돼 표결에 부쳐질 가능성까지 점쳐진다. 네타냐후의 구상이 성공하면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 영토인 요르단강 서안의 30%가 이스라엘 땅으로 넘어간다. 일단 합병되면 되돌리기 극히 어려울 뿐 아니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공존이 뼈대인 ‘2개 국가 해법’도 완전히 무력화된다.
유대인 정착촌은 1967년 ‘6일 전쟁’ 이후 끊임없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에 주택단지를 세우고 자국민을 이주시킨 마을을 말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가장 최근인 2016년까지 수차례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이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결의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채택해왔다. 군사점령지에 민간인 이주를 금지한 제4차 제네바협약(1949년 전시 민간인 보호 협약)이 근거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유대인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로 쓸어담겠다는 구상은 네타냐후 총리의 정치적 계산과 이스라엘 극우 세력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면서 힘을 얻고 있다. 강경우파 성향의 집권 리쿠드당 대표이자 5선 총리인 네타냐후는 재임 중 수뢰·사기·배임 등 부패 혐의로 지난해 11월 전격 기소돼, 5월24일 첫 법정 출두를 앞두고 있다. 본인은 모든 혐의를 부인하지만,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리쿠드당, 3월 총선에서 제1당 복귀이스라엘은 최근 1년 사이 세 차례나 총선을 치렀다. 지난해 4월과 9월 총선에서 집권 리쿠드당과 중도 성향의 야당 청백당이 각각 단독 과반 의석에 못 미치는 1위를 차지했으나 연정 구성에 실패했다. 이어 3월 총선에서 리쿠드당이 다시 1위를 차지하면서 네타냐후는 기사회생했다.
새해 벽두부터 지구촌을 휩쓴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도 네타냐후에겐 천우신조였다. 1년째 총선 결과를 반영한 새 정부가 꾸려지지 않은 위기까지 더해져, 청백당과 중도좌파 노동당, 극우 종교정당들까지 참여하는 비상 연립정부가 출범했다. 말이 비상 정부지 사실상 권력 나눠 먹기였다. 네타냐후 총리가 18개월 동안 먼저 총리직을 수행한 뒤, 청백당의 베니 간츠 대표가 총리직을 이어받기로 했다. 네타냐후의 전반기 총리직 재임 중 간츠 대표는 국방장관을 맡기로 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바로 팔레스타인의 운명이다. 리쿠드당과 청백당은 연정 구성 합의문에서, 새 비상 정부 출범 6개월 동안은 ‘코로나19 퇴치’와 관련한 법안만 의회 표결에 상정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또한 양 정당은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어떤 법안도 의회 표결에 부칠 수 없다고 합의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요르단강 서안 합병 계획이다. 최근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네타냐후가 최소한 자국 안에서는 (팔레스타인 영토의) 합병 앞에 놓인 모든 걸림돌을 제거했다”며 “이제 문제는 그가 ‘(합병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실제로 ‘할 것인가’다”라고 짚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네타냐후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다. 2017년 12월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이듬해인 2018년 5월 텔아비브에 있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지난해 11월엔 미국 국무부가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이 합법적”이라고 선언하며, 자국 정부의 기존 입장을 41년 만에 뒤집었다. 이어 올해 1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한 네타냐후 총리와의 회담 뒤 “세기의 협상”이라며 발표한 ‘중동 평화 구상’에서 유대인 정착촌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과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수도 지위를 거듭 ‘선언’해주었다. 최근 1년 새 연거푸 정부 구성에 실패한 이스라엘이 세 번째 총선을 불과 한 달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합병 강행은 미친 짓”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권이 거세게 반발하고 유엔이 우려를 표명한 이 ‘평화 계획’은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야합 의혹이 짙다. <하레츠> 보도에 따르면, 네타냐후 총리는 올해 3월 총선을 앞두고 미국 트럼프 정부에 ‘중동 평화 구상’에 ‘요르단강 합병 지지’ 문구를 포함해줄 것을 강력히 희망했다고 한다. 자신이 주도하는 우파 정당들의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에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이자 ‘중동 평화 구상’의 실질적 입안자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이 그런 구절을 일방적으로 명문화하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다. 대신, ‘미국-이스라엘 공동 지도 위원회’를 신설해 이스라엘의 새 국경을 정할 것을 권고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11월 미국 대선 이전에 팔레스타인 영토 합병을 완결짓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무리한 합병 추진이 역풍을 부를 가능성도 있다. 이스라엘 국가안보 자문을 한 미국의 국제안보 전문가 척 프라일릭은 “합병 강행은 ‘미친 짓’이 될 것”이라며 “네타냐후 총리가 자신의 업적을 쌓기 위한 정치적 압력에 이끌리고 있다”고 짚었다. 이스라엘 안보 전문가와 전직 장성 220여 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안보를 위한 사령관들’은 4월 초 성명을 내어 “일방적 합병은 주변국들과의 평화와 안보협력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며 “소규모 합병도 통제 불능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전면적 합병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