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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국의 아주 오래된 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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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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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흑인노예노동 배상 소송 제기…명문대학과 미디어 기업까지 대상 확대될 듯

사진/ 목화밭에서 일하는 흑인노예들. 현재 노예와 관련된 서류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난 2월26일 뉴욕에서 법대 졸업생인 한 흑인여성이 미국의 3500만 흑인들을 대신해 흑인노예제도 배상을 위한 단체소송을 제기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소송 대상은 명문대학과 언론사를 포함한 보험사·운송회사·철도·금융·직물회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노예노동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다른 그룹들까지 포함한다면 이와 관련한 소송 대상은 앞으로 1000여개 미국 기업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흑인노예노동에 대한 배상을 요구한 이번 단체소송은 지난 40여년간 비슷한 활동을 벌여온 여러 흑인인권운동가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었다. 이들은 그동안 누구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해야 할지, 어느 지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법적 조항을 적용해야 하는지 등등을 놓고 부심해왔다. 이번 소송은 그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준 것이다.

노예상인들이 만든 아이비리그


이번 소송은 지난 5년간 흑인노예 착취관계를 추적해온 노예의 후손 디드리아 파머 펄맨(36)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는 92세 흑인인권운동가 매리 레시 매디슨, 안드레 링턴 등과 함께 공동원고로 뉴욕 브룩클린 연방지법에 소장을 제기한 뒤 기자회견에서 “오늘의 소송이 앞으로 펼쳐질 다른 많은 노예 배상소송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배상소송이 뉴욕연방법정에 제기된 것은 과거 흑인노예들이 뉴암스테르담(현재 뉴욕)에 잡혀와 오늘날 세계경제의 심장부로 알려진 월스트리트가를 이루는 데 노동력을 착취당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소장에서 원고들은 미 유수의 보험회사인 애트나(Aetna)와 철도회사인 CSX, 금융기관인 플리트보스턴 등을 포함한 7개 기업과 차후에 열거할 100여개 기업들에 배상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애트나 보험사는 노예를 상품화해 보험약정으로 부당이익을 챙겼으며, CSX 철도회사는 노예들을 철로건설에 투입해 이윤을 남겼고, 플리트보스턴 금융기관은 전신인 프로비덴스뱅크를 노예상인이 설립했다는 것이다.

총 70개 항목으로 구성된 소송서류의 서두는 1619∼1865년까지 실시된 노예제도에서 약 800만명의 노예들의 생명과 자유권, 문화유산이 비도덕적이며 비인간적으로 착취당한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1790∼1860년 흑인노예들에게 미지불된 임금만도 약 4000만달러가 된다며 이는 현 시세로 무려 1조4천억달러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 액수는 지난해 미 국내총생산의 약 10% 정도가 된다.

한편 피고 쪽인 애트나 보험사는 이미 원고 쪽에 과거 노예 관련 서류를 제공하는 등의 협조를 했으며, 2000년에는 공개사과를 했다며 배상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꾸준히 흑인 커뮤니티를 위한 경제적 지원도 해왔다고 강조했다. CSX 철도회사의 경우 “노예제도는 비극의 역사지만 배상소송은 실효성이 없다”고 밝혔으며, 금융기업인 플리트보스턴은 “소송서류를 검토한 뒤 적절한 대응책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노예노동 배상문제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 법정소송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부 미국의 명문대학들도 거론되고 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데일리 프린스턴>은 최근 노예노동 배상을 위한 배상조정위원회 자료를 인용해 프린스턴 대학교를 위시한 예일대·하버드대·브라운대·버지니아대 등이 피소될 것으로 보도했다. 소장에서도 나타났지만 예일대와 브라운대는 노예착취의 대가로 설립된 대학으로 지목됐다. 예일대의 경우 교수 초빙, 장학제도, 도서관 등을 모두 노예상인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으며, 더 나아가 1830년대 최초의 흑인대학이 설립될 당시 이를 반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폭로했다. 브라운대 역시 노예상인이던 존 브라운과 니콜라스 브라운이 투자해 설립한 대학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버드 법대도 노예 상인들에게서 기부금을 받아 세워졌다고 이 신문은 밝혔다. 언론사 가운데에는 미국에서 최대 언론그룹의 하나인 나이트릿더 그룹이 거론되고 있다. 이 그룹이 소유한 조지아주의 <마콘 텔레그래프>는 과거 노예광고를 게재해 이득을 보았다는 것이다.

추가소송 뒤따를 듯

사진/ 노예노동 배상소송을 제기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디드리아 파머 펄맨(왼쪽). 그는 5년 동안 노예 착취문제를 추적해왔다.
단체소송에 뛰어들 또 다른 그룹으로는 ‘배상평가 그룹’이 있다. 지난 2000년 11월에 결성된 이 그룹은 과거 O.J.심슨 재판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흑인계 자니 카크란 변호사를 위시한 쟁쟁한 변호인단과 학계 전문가, 인권운동가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들 변호사 가운데는 나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대리해 이들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스위스뱅크 등 유럽 각국의 기업들을 대상으로 싸우는 마이클 하우스펠드 변호사도 있다. 그는 현재 미국 내 배상소송의 일인자로 손꼽힌다. 앞으로 워싱턴D.C.에 정식으로 노예노동 배상소송을 위한 사무실을 개설한다는 배상평가 그룹의 카크란 변호사는 소송대상자로 남부의 노예주와 노예착취와 관련된 기업들이 지목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또 이 그룹의 하우스펠드 변호사는 노예를 실어 나른 영국의 상선회사와 네덜란드 상선들, 독일의 은행들을 포함시킬 것도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단체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그룹에 ‘엔 코브라’도 있다. 워싱턴D.C.에 있는 이 그룹은 미 연방정부가 흑인노예제도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6개항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요구사항 중에는 정부의 공식사과와 함께 노예후손들에게 금전보상을 실시하고, 전후 마셜플랜과 같은 복지사업을 흑인 커뮤니티에 지원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한 흑인노예기념관을 워싱턴 내셔널몰 안에 건립하고, 연방의사당 내 흑인노예추모비를 세워야 하며, 의회 청문회를 개최해 노예제도의 부정을 고발하라고 요구했다.

흑인노예가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619년 초 네덜란드 노예상인들이 영국식민지였던 버지니아 지역의 담배농장에 이들을 공급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노예유입이 늘어나 조지 워싱턴 대통령 시절에는 약 70만명의 흑인노예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대부분은 남부지역에 살았다. 노예가 밀무역으로 급증하면서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860년에는 약 400만명이 대부분 남부 11개주에 살았다. 당시 젊고 건장한 노예는 2000달러까지 매매됐다고 한다.

컬럼비아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에릭 포너는 “대부분의 흑인노예들에게는 법적 서류가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고 말했다. 한 예로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했으며 제3대 대통령이던 토마스 제퍼슨도 평생 동안 100여명의 노예를 두었으나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지 않았다. 몇년 전 제퍼슨 대통령이 흑인노예인 샐리 해밍스와의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둔 것이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 4월12일 부시 대통령은 제퍼슨의 258주년 생일을 맞아 백악관에서 기념행사를 주최하면서 그 자리에 샐리 해밍스의 후손을 초청해 다시 화제가 됐다. 흔히 ‘노예해방전쟁’이라고 하는 남북전쟁에서 미국은 폐허가 된 남부 재건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노예문제만은 남북 어느 쪽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다. 남북 양쪽은 전쟁까지 벌이고도 용서와 화해를 이루었으나 흑인에 대해서만은 2등시민으로 남겨두었다.

재판보다는 합의 노려

이 때문에 노예노동 배상에 대해 미국 내 분위기는 상당히 고조되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피소된 대부분의 기업들은 노예제도 당시 자신들이나 전대의 관련자들이 행한 사항이 당시로써는 법적인 관례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사자인 흑인사회에서도 배상문제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2월 , 갤럽 등이 공동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기업의 배상책임을 흑인들의 57%만이 찬성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조지 부시 대통령도 배상문제에 개인적으로는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과거 클린턴 대통령도 1998년 사과표명은 했으나 배상문제에는 거부감을 나타냈다. 실제로 95년 한 흑인이 연방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했으나, 제9순회연방항소법원은 ‘국가면책’을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따라서 이번 흑인노예배상 소송자들은 정부기관보다는 주로 노예착취와 관련된 기업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으며, 앞으로 여론몰이에 나서 재판보다는 기업들을 합의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1차 목표를 두고 있다.

뉴욕=김지현/ 자유기고가 lia21c@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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