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한 루이제 린저, 그를 보내며…
한국인들에게 <생의 한가운데>로 사랑을 받았던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가 지난 3월17일 90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독일 <제1공영방송>은, “흑과 백이 있을 뿐, 루이제 린저에게 그 중간은 없었다”라며 그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1962년 린저는 신문기고를 통해, “난 우리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문학이 그들의 삶에 두 번째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은 비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죠”라며 ‘삶과 문학의 일치’를 강조했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자 사회주의자로 고백한 그는 소설, 수필, 일기 그리고 기행문 등 40여권에 이르는 작품들과 함께 문학과 현실적 삶 사이의 경계선을 지우려고 노력해왔다.
1939년 교사들에 대한 나치조직 가담 요구를 거부하면서, 그는 4년간의 교직생활을 뒤로 한 채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41년 발표된 그의 처녀작은 ‘국가반역죄 및 군대모독죄’로 판금 조치를 당했다. 오페라 연주단의 지휘자이던 그의 첫번째 남편은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고, 린저 자신 또한 사형선고를 받았다. 형 집행 직전 나치가 패전하는 바람에 극적으로 살아난 그는 이후 출판된 <옥중일기>에서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네”라는 고백을 통해 어떤 조건에서도 ‘그 무언가를 행할 수 있다’는 이후 그의 삶의 소중한 원칙을 이야기했다.
윤이상과의 만남과 방북
50년대 서독지역에서 브레히트를 거론하는 것은 하나의 금기였다. 그가 공산국가 동독에 거주하는 작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루이제 린저는 이를 깨고 브레히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고, 이 시기에 <생의 한가운데>를 비롯하여 그의 대표작이 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68년 이후, 그는 68운동에 참여하면서 반전, 반핵 그리고 여성운동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갔다. 70년대에는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1984년에는 린저 자신이 신생 좌파정당 녹색당의 총리 후보로 나섰다. 이 선거에서 그는 역대 총리 중 독일국민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았던 사민당 바이체커 후보와 겨루며 독일 정치사의 한장을 장식했다. 독일 총선은 이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양대 거대정당 기민·기사 연합과 사민당 후보들만의 각축장이었기 때문이다. 68운동 세대가 핵심을 이룬 녹색당의 후보로 나섰을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칠순을 훌쩍 넘어섰다. 린저는 자신에게 보낸 독자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하고자 노력했고, 독자들은 전례 없는 애정으로 린저의 이러한 노력에 답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언가 잘못된 세계와 성급한 화해”를 거부하고자 한 그에게 독자와의 교감은 열린 토론의 장이었다. 1994년 <산마루 타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은 린저가 50살 연하의 독자와 사랑에 빠져 나눈 편지들을 모아낸 것이다. 이러한 열정의 소유자인 린저에게 음악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첫번째 남편이 그러했고, 현대음악 작곡가인 두 번째 남편과의 5년간 짧았던 결혼생활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린저는 60년대 끝 무렵 독재자 박정희를 피해 독일로 온 작곡가 윤이상과 조우하게 된다. 중앙정보부가 윤이상을 서울로 납치하자, 구명운동에 적극 나선 그는 윤이상과의 대담집 <상처받은 용>을 내놓았다. 윤이상과의 교감은 린저를 자연스럽게 한반도의 또 다른 독재자 김일성 주석과의 친분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냉전시기였던 80년대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서술한 <또 하나의 조국>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북한이 서구국가들에서 이른바 공산주의 ‘괴뢰집단’으로 비난받던 상황에서 북한을 조명한 린저의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차례 방문을 통해서도 북한의 억압된 질서를 보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호의적인 김일성 주석에 대한 태도는 그의 삶의 오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베를린=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

사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자 사회주의자라고 고백한 루이제 린저.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윤이상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한겨레)
50년대 서독지역에서 브레히트를 거론하는 것은 하나의 금기였다. 그가 공산국가 동독에 거주하는 작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루이제 린저는 이를 깨고 브레히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고, 이 시기에 <생의 한가운데>를 비롯하여 그의 대표작이 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68년 이후, 그는 68운동에 참여하면서 반전, 반핵 그리고 여성운동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갔다. 70년대에는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1984년에는 린저 자신이 신생 좌파정당 녹색당의 총리 후보로 나섰다. 이 선거에서 그는 역대 총리 중 독일국민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았던 사민당 바이체커 후보와 겨루며 독일 정치사의 한장을 장식했다. 독일 총선은 이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양대 거대정당 기민·기사 연합과 사민당 후보들만의 각축장이었기 때문이다. 68운동 세대가 핵심을 이룬 녹색당의 후보로 나섰을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칠순을 훌쩍 넘어섰다. 린저는 자신에게 보낸 독자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하고자 노력했고, 독자들은 전례 없는 애정으로 린저의 이러한 노력에 답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언가 잘못된 세계와 성급한 화해”를 거부하고자 한 그에게 독자와의 교감은 열린 토론의 장이었다. 1994년 <산마루 타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은 린저가 50살 연하의 독자와 사랑에 빠져 나눈 편지들을 모아낸 것이다. 이러한 열정의 소유자인 린저에게 음악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첫번째 남편이 그러했고, 현대음악 작곡가인 두 번째 남편과의 5년간 짧았던 결혼생활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린저는 60년대 끝 무렵 독재자 박정희를 피해 독일로 온 작곡가 윤이상과 조우하게 된다. 중앙정보부가 윤이상을 서울로 납치하자, 구명운동에 적극 나선 그는 윤이상과의 대담집 <상처받은 용>을 내놓았다. 윤이상과의 교감은 린저를 자연스럽게 한반도의 또 다른 독재자 김일성 주석과의 친분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냉전시기였던 80년대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서술한 <또 하나의 조국>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북한이 서구국가들에서 이른바 공산주의 ‘괴뢰집단’으로 비난받던 상황에서 북한을 조명한 린저의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차례 방문을 통해서도 북한의 억압된 질서를 보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호의적인 김일성 주석에 대한 태도는 그의 삶의 오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베를린=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