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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죽음보다 진한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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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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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폭공격 감행한 두명의 팔레스타인 여성…왜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는가

사진/ 나블루스에서 자폭을 감행한 다린의 영정을 어머니가 들고 있다. (아시아프레스)
화약 냄새와 먼지. 흐른 피를 닦고 있는 사람들, 깨진 유리를 치우고 있는 사람들. 기자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난 1월27일 자폭테러가 일어난 예루살렘 번화가의 모습이었다. 현장에는 많은 군인과 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고, 긴장감도 한층 고조되어 있었다. 이날 자폭으로 81살의 이스라엘 노인이 죽었고, 15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아이를 잃어버린 여성들

기자는 이날 저녁 자폭공격을 감행한 사람의 실체에 관한 소식에 접하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청년인 아닌 팔레스타인 여성이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여성의 자폭은 이슬람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여성 기자로서 10여년이 넘도록 팔레스타인을 취재해오던 기자는 왜 팔레스타인 여성이 자폭을 감행했는지, 또 그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여성의 신분이 확인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이틀 뒤였다. 그의 이름은 와파 이드리스(28). 그는 요르단강 서안 라말라에 인접한 알 아마리 난민촌에 살고 있었다. 그는 라말라 근교에 있는 적신월사(赤新月社 : 적십자사를 의미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는 십자가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원이 담겨 있기 때문에 적십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이슬람 신앙의 근원인 ‘달’로 바꾸어 사용한다) 자원봉사 구급대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진/ 와파의 장례식. 많은 군중이 그를 추모했다. (아시아프레스)
와파는 18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3명의 오빠는 결혼해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그는 어머니와 단둘이서 살고 있었다. 그가 16살이 되던 해 팔레스타인의 저항운동 인티파다가 시작되었다. 재기발랄한 그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무장한 이스라엘 병사들에게 돌을 던졌다. 다른 여자들이 도망칠 때에도 그는 홀로 남아 투쟁을 계속했다. 오빠가 이스라엘 교도소에 있다는 것도 그가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를 갖게 된 원인의 하나였다.

이후 와파는 여성조직에 가담해 저항운동으로 희생된 젊은이의 유족을 돌보는 일을 했다. 그는 통금령이 내려지면 식량을 운반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여성이었다. 그의 숙모는 “와파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결혼했는데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8년 만에 여자아이를 임신했는데 6개월 만에 유산해서 다시는 애를 못 낳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부부 사이에 금이 가서 3년 전에 이혼했다”고 설명했다.

와파가 구급대원으로 일하게 된 건 이혼 뒤였다. 팔레스타인에서는 2000년 9월부터 저항운동이 시작돼 날마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와파는 아침부터 때로는 밤 늦게까지 저항운동을 하다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후송했고, 치료하는 것을 도왔다. 언젠가 와파는 앰뷸런스로 임신부를 긴급하게 병원에 후송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군은 검문소에서 무슨 이유인지도 밝히지도 않은채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사정해도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 승강이의 와중에 태어난 아기는 죽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피곤하다며 방에 들어간 채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와파 마음 속에서는 자기 아기를 잃었을 때의 기억과 그 사건이 교차되었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이스라엘군이 쏜 총을 머리에 맞은 젊은이를 후송할 때였다. 금방이라고 터져 흘러나올 것만 같은 뇌를 손으로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차의 바퀴가 무엇인지에 걸려 흔들리는 순간 그 젊은이는 와파 품에서 숨을 거뒀다. 그날도 와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 남편이 눈앞에서 죽었다”

사진/ 가자지구를 침공한 이스라엘군의 전차. 폭력은 증오를, 증오는 보복을 부른다. (아시아프레스)
와파처럼 구급대원으로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은 2천명 정도. 그들 가운데 라말라의 현장에서 매번 활동하는 사람은 20명 정도로 대부분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등 젊은 사람들이다. UPMRC(팔레스타인 의료구조센터)에서 일하는 메이슨(17)도 그 중 한 명. 그는 처음 저항운동이 시작되던 해, 가족과 같이 미국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날마다 TV로 부상당한 아이들의 보습을 보았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메이슨은 아직 고등학교 2학년생이다.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번 저항운동이 시작된 이후다. 많은 봉사활동자들이 저항운동을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부상을 입는 건 이스라엘군과 싸우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다. 구급대원들 중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구급대원이나 앰뷸런스 기사 중 10여명이 죽었다. 실명한 사람, 입 안에 총알이 들어가 이가 전부 부러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고무탄을 맞은 사람이나 최루탄을 들이마신 사람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런 위험한 현장에서 활동하는 그는 “내 나이 또래 애들이나 어린 애들이 싸우고 있는데 무섭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요?”라고 말한다. 그는 와파의 자폭공격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죄 없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나쁘다. 하지만 날마다 부상자를 돌봐주다 보면 답답함이 쌓여만 간다. 그런 마음이 증오심으로 변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와파의 사건이 일어난 지 한달이 지난 2월27일, 또 한 여성이 자폭을 감행했다. 두 번째의 일이다. 이스라엘과 요르단강 서안과의 접경지대에 있는 검문소에 자폭공격이 행해졌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 경찰 3명이 부상했다. 그의 이름은 다린(21). 나블루스의 명문 나자하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이었다. 다린은 하마스를 찾아가 자폭을 자원했다. 하마스는 여성의 자폭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다음에 알 악사 순교여단을 찾아가 자폭을 감행했다.

공부를 좋아했던 다린의 꿈은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0년 9월부터 시작된 저항운동으로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했다. 이스라엘군은 나블루스로 통하는 주요 도로를 봉쇄했기 때문에 학생들 가운데는 등교하지 못하는 학생도 많아 휴강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다린은 대학을 졸업하겠다는 생각을 버렸고, 교사가 되겠다는 꿈은 식어만 갔다.

다린은 어느 날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넋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성의 표정이 비쳤다. 나블루스 근교의 이스라엘군 검문소에서 한 병사가 한명의 팔레스타인 남성을 사살하고, 그의 아버지와 아내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때 상황을 그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내 남편을 내 눈앞에서 죽였다. 나는 혼란상태에 빠졌으며 진통도 찾아왔다. 그리고 앰뷸런스가 오길 바랐다. 병사들이 ‘니 뱃속엔 뭐가 있나’고 묻기에 말이 안 통하니까 나는 “baby, baby”라고 외쳤다. 그들은 날 보고 옷을 다 벗도록 명령했다. 나는 속옷도 다 벗어야 했다. 앰뷸런스가 오기까지 2시간, 나는 아무것도 안 입은 채로 길가에서 계속 엎드려 있어야 했다.”

공격과 보복은 끊이지 않고…

이 사건을 TV로 지켜보던 다린은 혼자 울고 있었다고 숙부는 말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다린에게 어떤 중대한 결심을 하게 했다. 다린은 2월27일 아침, 어머니에게 검문소에 있다고 연락한 걸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다린이 자폭한 다음날, 이스라엘군은 나블루스에 인접한 바라타 난민촌에 침공했다. 수십대의 탱크가 난민촌을 포위해 병사들은 팔레스타인인의 집들을 구석구석 수색했다. 난민촌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집은 이스라엘군에 의해 점령당해 가족들은 1층에 있는 한 방에 갇혔다.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마음대로 화장실에 갈 수도 없었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집 벽에 큰 구멍을 뚫어 집에서 또 다른 집으로 이동해갔다. 남자들은 이미 연행되었거나 도망쳐서 집에는 여성이나 노인, 어린이들만 있었다. 밤에는 아파치 전투기가 상공을 선회하면서 해가 뜰 때까지 공격을 계속했다.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떨어야 했다.

3월12일, 이스라엘군은 요르단강 서안 라말라에 100여대의 탱크로 침공했다. 1982년에 펼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이후 최대의 작전이었다. 이스라엘군은 라말라에 인접한 알 아마리 난민촌도 침공했다. 팔레스타인 여성으로 최초로 자폭을 감행한 와파의 집도 이날 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번 저항운동이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이스라엘의 소탕작전이었다. 유엔이나 아랍국가 등 국제여론의 반발로 미국이 중재에 나서 사태는 진정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시적인 정전은 가능해도 그 뒤 있어야 할 협상의 길은 멀기만 하다. 점령이라는 근본문제가 없어지지 않는 한 제2, 제3의 와파나 다린이 나타날 것이다.

라말라=후루이 미즈에/아시아프레스 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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