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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크리켓 전쟁, 애국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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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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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스포츠 - 인도

느림보로 소문난 인도 스포츠계, 민족주의 조장하며 파키스탄 깨는 데만 열광

사진/ 프라풀 비드와이(Praful Bidwai), 전 <타임 오브 인디아>편집장·핵 전문 칼럼니스트.
인도의 스포츠는 암울한 인도의 정치정세처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지니고도 도무지 맥을 못 추는 느림보로 소문나 있다. 육상이든 구기든, 또는 물 속이건 눈밭이건 어느 경우에도 제대로 내달아 본 적이 없었다.

무슬림이 파키스탄을 응원한다고?


굳이 따져보자면, 영국 식민지의 전통을 물려받은 지루한 크리켓 경기나 하키 정도를 내세울 만하겠지만, 그 크리켓이란 것도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심각한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 버려 스포츠라 부를 여지가 별로 없다. 옛 영국식민지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크리켓 경기를 볼라치면,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 특히 인도와 파키스탄이 한판 붙기라도 하면, 가히 전면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경기장은 충성심과 애국심의 경연장이 되고 만다.

사진/ 크리켓 경기. 인도와 파키스탄이 한판 붙기라도 하면, 경기장은 충성심과 애국심의 경연장이 되고 만다. (SYGMA)
이래서 지난 수십년 동안 크리켓의 지위는 인도-파키스탄의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라 부를 만했다. 가령, 남아시아에서 인도-파키스탄의 크리켓 경기를 볼 수 없다면, 그건 두 나라가 토라져 있다는 증거였다. 인도의 힌두 우익으로 파시스트 쉬브 세나(힌두교 파멸의 신인 쉬바의 군대)라 자칭하는 그룹들이 최소한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스포츠 상대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탓이다.

이 정신나간 극우 힌두주의자들은 인도의 무슬림들이 적인 파키스탄 팀을 응원한다고 비난해 왔고, 결국 인도의 소수 무슬림 관중들은 애국적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당해 왔다. 그러나 스포츠판의 이런 애국심도 충성심도 그리고 민족주의도 따지고 보면 모두 부정한 돈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데 사태의 심각함은 깊어진다.

영화배우나 가수 뺨치는 스타가 되어 국가적 영웅 대접을 받고 또 경기 당 수백만 루피를 얻는 크리켓 선수들이 있다면, 경기장 한쪽에서는 선수를 매수해서 승부조작을 통해 거금을 챙기는 사기 도박이 횡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의 크리켓 스캔들은 인도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까지 주목을 받으며, 스포츠판의 도덕적 타락과 결부된 돈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결국 이 불쾌한 상업주의가 바로 애국심과 충성심을 자극한 민족주의의 뿌리였다니! 이처럼 막대한 돈줄이 넘치고 넘치는 판인데도, 민족주의를 내세운 애국심 경쟁이 하늘을 찌를 판인데도 인도의 스포츠는 국제사회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실정이니 그저 허탈하기만 하다는 것이 보통 시민들의 생각이다.

간단하게 말해, 민족주의 조장에 필요한 또는 극우·맹신적 애국심 고취에 유리한 부분만을 스포츠의 구성요건이라 믿는 전근대적인 집단과 조직이 인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탓이다. 이들의 관심은 적 파키스탄을 깨는 일에 집중되어 있고, 이들의 최후·최고 목표는 적 무슬림을 타도하는 일로 설정되어 있다보니, 스포츠도 타도 수단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올림픽서 펄펄 날지 못하는 이유

자, 이래도, 인도가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적인 스포츠행사를 놓고 가장 흥미 없어 하는 국가로 낙인찍힌 게 놀라운 일이 될 수 있을까? 인도가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 수준의 경기에서 펄펄 날지 못하는 현실, 이건 어떤 민족 우월주의적 메시지도 전달할 수 없고, 적을 깨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 못해 결국은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이익에 전혀 봉사할 수 없는 스포츠 행사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스포츠를 발전시키기 위한 유일한 대책은 파키스탄의 스포츠를 먼저 발전시키는 일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괜스레 나온 게 아니었다. 민족주의와 스포츠가 강한 결탁을 한 채 갓길을 달리는 동안, 인도 국민들은 스포츠의 대로에서 쫓겨나 허약한 몸으로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정처없는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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