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축구내기와 자전거도둑

400
등록 : 2002-03-12 00:00 수정 :

크게 작게

아시아의 스포츠 - 캄보디아

최초의 축구도박장 ‘로열캄보디아골’ 탄생… 꼬마에서 노인까지 판돈을 향한 집념

사진/ 푸 키아(Puy Kea), <교토뉴스> 프놈펜 특파원.
세계적으로 남성들은 축구경기를 놓고 열광한다는데, 캄보디아에서는 주로 10대들이 축구에 미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축구도박에 정신을 잃은 상태다. 캄보디아에서 축구도박이 산업이라 불릴 만큼 위세를 떨치게 된 건, 지난 ‘유로 2000’ 경기부터다. 축구도박의 원조를 훈센 총리의 ‘100달러짜리 승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98년 월드컵 기간에 훈센 총리는 당시 공동총리였던 웅후엇과 내기를 걸어 100달러를 땄고, 그 돈을 극빈자 구호용으로 기부하면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축구도박의 원조, 훈센 총리


사진/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축구 도박장 '로열캄보디아골'. 캄보디아 축구는 최약체지만 축구열기만은 그 어느 나라 못지않다. (Puy Kea)
물론 지난 2월2일까지 축구판의 내기는 불법이었고, 프놈펜시 당국은 일부 불법도박장과 도박꾼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당국자는 내게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건넸다. “축구도박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차라리 합법화하는 게 세금 징수라도 할 수 있고 불법조직들을 관리할 수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로열캄보디아골’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단 최초의 축구도박장이 탄생했고, 캄보디아 젊은이들은 합법적으로 내기판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심지어 초등학생과 중학생들까지 내기에 광분했고, 이 아이들이 부모에게 거짓말을 해 판돈을 조달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 지금 캄보디아에서는 축구도박을 놓고 “좋다 싫다” 말들이 무성하다.

이런 가운데 요즘 캄보디아 사회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을 탓할 만한 자격을 갖춘 어른들이 흔치 않은 탓이다. 교사도 정부관리도 그리고 기자들도 모조리 도박판에 열광해 있는 형편이다보니, 아이들을 나무랄 만한 인물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도박중독자인데 뭘 이야기할 수 있겠나?” 캄보디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는 선배에게 축구도박 문제를 놓고 자문을 구했더니 되돌아온 말이다. 농담반 진담반 섞은 그 선배 왈 “적어도 축구도박 합법화는 잘한 일로 보인다. 카지노 도박 같은 것보다는 축구판 내기가 나은 편이고, 이런 축구 열기를 통해 아이들이 간접적으로나마 기술을 배우고 세계무대로 도전하겠다는 꿈을 키울 수 있지 않겠나?”

그리 반박할 만한 단서가 없어 웃고 말았는데, 거리를 돌아보면 기술도 꿈도 아닌 심란한 현실과 부딪치게 된다. 자전거를 팔아먹은 초등학생, 오토바이를 훔친 중학생, 행인의 돈을 갈취한 고등학생, 이렇게 저렇게 잡혀온 아이들이 모두 판돈을 향한 집념 때문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게다가 로열캄보디아골이 떴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수백개의 불법 축구도박장이 버젓이 열려 있다.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가운데, 1달러에서 1만달러짜리 판돈들이 뒤섞여 하루 불법으로 돌아가는 돈이 30만달러는 족히 넘을 것이라고 한다.

도박은 있어도 스포츠는 없다

승부에 따른 판돈의 주고받기를 놓고 폭력이 난무하고 불법 깡패조직들이 개입하던 전통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러니 축구도박 합법화는 로열캄보디아골의 사업허가권을 따낸 홍콩 사업가를 위한 잔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들이 나돌 만도 하다.

축구가 캄보디아의 전통 스포츠도 아니었고, 캄보디아 국가대표팀이 국제축구대회에서 무슨 상을 받았다거나 이겼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도 없을 만큼 약체인데, 그 축구열기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니, 이 일을 어이해야 할는지…. 이런 현상도, 이런 현실도 모조리 또 단골메뉴인 “오랜 내전 탓으로 캄보디아 사회는…” 식으로 얼버무릴 모양인데, 정직하게 말하자면 캄보디아에는 도박만 있지 스포츠는 없다. 기껏 타이복싱- 킥복싱으로 알려진- 이 캄보디아에서 유래했다는 자위적인 소리만 지를 뿐, 정부도 언론도 교육기관도 또 시민단체도 모두 정신을 딴 데만 팔고 있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