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이 분쟁 지역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보는 게 좋겠다. 시리아와 아프간에서 철군하기로 한 결정은 재고해야 한다.”(로저 위커 공화당 상원의원)
트럼프 대통령의 ‘충실한 우군’이던 공화당 중진들까지 시리아·아프간 철군 결정을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오바마 행정부 출신인 수전 라이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2월23일 진보 일간지 <뉴욕타임스>에 보낸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백악관 자체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됐다. 매티스 장관을 사임하게 한 충동적 결정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적성국가보다 더욱 미국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1947년 국가안보법이 만들어진 이래 미국의 국가 안보 정책 결정 과정이 이토록 엉망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분별하고 일방적인 결정을 갑자기 발표할 수 있었던 건, 국가 안보 정책 결정 과정이 위험할 정도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극명히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 발표 다음날,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전격 사임 의사를 밝혔다. 워싱턴 정가의 혼돈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매티스 장관은 12월20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이렇게 밝혔다.
“동맹국을 존중하고, 적대 세력과 전략적 경쟁자에게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내 믿음은 지난 40여 년에 걸쳐 국가 안보를 다뤄온 경험으로 확고해졌다. 미국의 안보와 번영, 가치를 진작시키는 데 최선인 국제 질서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동맹과 연대하는 게 이런 노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 … 대통령은 안보 인식이 잘 맞는 사람을 국방장관으로 삼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1969년 입대해 해병 4성 장군을 지낸 매티스 장관은 아프간전쟁 초기에 현지에서 복무했다. 그는 국장장관 취임 후 줄곧 시리아·아프간 철군에 분명한 반대 뜻을 밝혔다. 그는 정부 안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충동적’ 외교·안보 정책을 견제하는 역할을 적극 수행한 인물이다. 미 정치권이 매티스 장관의 사임을 예사롭게 넘기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백악관을 지키고 있던 마지막 남은 어른이 사라졌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은 장난감을 멋대로 집어던질 게다.”
스콧 루카스 영국 버밍엄대 교수(국제정치)는 12월20일 인터넷 매체 <컨버세이션>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매티스 장관은 트럼프 행정부에 참여한 예비역 대장 3명 가운데 1명이다. 루카스 교수는 “잘못된 정보에 기반해, 감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막아내는 게 이들 3명의 임무였다”고 표현했다.
시리아 텔 나스리의 폐허가 된 교회는 7년을 넘긴 시리아 내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REUTERS 연합뉴스
육군 대장 출신 허버트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 4월 제일 먼저 퇴임했다. 뒤를 이어 해병 대장 출신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이 12월 말 사임하기로 했다. 매티스 장관은 12월20일 사임 서한에서 후임자의 인사청문회 등을 이유로 2019년 2월28일 사임하겠다고 밝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12월23일 패트릭 섀너핸 부장관이 1월1일부터 국방장관 직무를 대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역시, 트위터를 통해서였다. 매티스 장관의 퇴장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어디를 향할 것인가?
‘아랍의 봄’이 한창이던 2011년 3월15일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7년9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21세기 벽두에 터진 9·11 동시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2001년 10월7일 시작된 아프간전쟁은 17년2개월을 넘긴 지금껏 계속된다. 미 역사상 최장이자 최악의 전쟁인 베트남전쟁은 1955년 11월1일부터 1975년 4월30일까지 19년5개월여 이어졌다. 이대로라면, 아프간전쟁이 기록을 갈아치울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나온 이유다.
미국이 시리아 내전에 지상군 병력까지 투입한 결정적 계기는 시리아 국경을 넘어 이라크 북부와 서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이슬람국가에 있다. 2014년 9월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프랑스 등이 가세하면서 시리아 남부와 이라크 국경 지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이슬람국가의 세력은 미미해진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12월20일 아침 8시10분께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이슬람국가와 싸워 역사적 승리를 거뒀다. 이제는 우리의 위대한 젊은이들을 집으로 데려올 때”라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승리’ 주장은, 이라크 침공 초기인 2003년 5월1일 ‘임무 완수’를 선언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15년 세월이 지난 지금껏 이라크는 혼돈의 땅으로 남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이슬람국가 세력이 현격히 밀린 건 사실이지만, 잔존 세력은 여전히 있다. 미군 지상군 병력 철수는 이들이 조직을 정비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영국·프랑스 등 동맹국도 미군 철수로 작전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미국과 나란히 이슬람국가에 맞서 싸워온 쿠르드족 무장단체는 당장 현실적인 위협에 직면하게 됐다. 자국 내에서 오랫동안 독립 투쟁을 벌인 쿠르드족을 ‘테러범’으로 여기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벌써 시리아에서 전투를 벌이는 쿠르드족 무장단체를 ‘소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사전 준비 없이 미군이 전격 철수해 ‘자중지란’이라도 벌어진다면, 위기로 내몰렸던 이슬람국가만 손뼉을 칠 게 뻔하다.
아프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17년 세월을 넘겨 싸웠음에도, 침공의 목적이던 탈레반 세력 소탕은 요원하기만 하다. 한때 파키스탄 국경 지대로 몸을 숨겼던 탈레반은 이미 아프간 국토의 절반가량을 세력권 아래 두고 있다. 아프간 주둔 미군이 2018년 들어 지난 17여 년 만에 최대 규모 공습을 단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애초 군사적 승리에 초점을 맞췄던 미국이 정치적 타결을 위한 협상으로 옮겨간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미국과 탈레반은 아랍에미리트의 중재로 평화 협상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적인 아프간 주둔 병력 절반 철수 발표에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옛 공화당 주류 질서로 복귀 중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처럼, 아프간 주둔 병력이 7천 명 선으로 줄어들면 미군이 현지에서 해온 아프간군 훈련 프로그램은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남은 미군 병력도 주요 대테러 작전과 바그람 공군기지를 비롯한 거점 기지 방어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탈레반으로선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설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미군 철수는 탈레반의 오랜 요구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인 철군 결정으로 탈레반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도 협상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을 얻은 셈”(마이클 쿠겔먼 우드로윌슨국제센터 연구위원)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왜 이 시점에, 시리아·아프간 철군 결정을 내렸을까? <노동계급의 공화당: 레이건과 블루칼라 보수주의의 복귀>를 쓴 언론인 헨리 올젠은 12월20일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 스타일의 외교·안보 정책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 매티스 장관은 ‘초당적 외교정책 합의’란 그간의 전통을 강조해왔다. 그의 사임으로 앞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매티스 장관이 대표해온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오랜 전통이 충돌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를 시작하기 전부터 미국의 ‘개입주의’에 노골적인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2016년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미국은 아프간과 이라크, 시리아에 군대를 보내 무엇을 얻었나? 장기간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부었고,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대체 뭘 위해선가?’ 적잖은 미국인이 이에 공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아프간 철군 결정을 전격 발표한 것은, 이같은 오랜 신념을 본격적으로 행동에 옮기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집권 후반기,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준비에 시동을 건 모양새다.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같은 사람이 왜 미군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고, 수십억달러를 아끼는 데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왜 적국인 시리아를 위해 미군이 싸워야 하는가? 이제는 미국에 집중해야 할 때가 됐다. 미국 젊은이들을 집으로 데려와야 할 때다.”
안팎의 비난이 폭주하던 12월21일 새벽 4시22분께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그의 이런 주장을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공화당 주류의 인식과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당시 공화당 주류는 이민 제한, 관세 강화, 외교적 고립주의를 외교·안보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현 공화당 주류와 엇나가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과 고스란히 맥을 같이한다. 그러니 트럼프 대통령은 단순히 공화당 주류의 인식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옛 주류 질서로 복귀를 시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올젠은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이 지구촌 차원에서 ‘개입의 그물망’을 넓히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을 믿지 못하면서다. 전통적 고립주의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미국의 국익과 안전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게다. 소련의 몰락으로 ‘개입주의’는 근거를 잃게 됐지만, 오랜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미국의 경쟁국은 힘이 커지고 있다. 중국의 부상과 함께 미국 경제의 위력이 줄고 있다. 해법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던진 질문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일방주의는 동맹을 망친다
미국 일간지 <유에스에이투데이>는 12월24일 매티스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의 명에 따라 시리아 주둔 미군 병력 감축을 위한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미 정치권 안팎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와 달리 미군이 실제 시리아와 아프간에서 철군하지 않을 가능성은 여전하다”는 전망도 없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간 여러 차례 중요한 정책 결정을 뒤집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안팎의 비난과 우려 속에 트럼프 대통령이 12월26일 이라크를 깜짝 방문한 것도 이런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적인 철군 발표가 던진 ‘메시지’다. 일방주의는 동맹을 망친다. 존중 없이는, 동맹도 없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