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5일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 북부 티후아나에서 최루탄이 터지자, 카라반에 참여했던 온두라스 여성이 5살 쌍둥이 딸의 손을 잡고 황급히 피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10월27일 카라반 행렬이 멕시코 남부 산페드로타파나테펙을 지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산페드로술라를 출발한 일행은 이틀간 120㎞를 걸었다. 인파는 이미 1천 명을 넘어섰다. 《AP》통신은 10월15일 “과테말라 국경 지역에 온두라스인 약 1600명이 몰려들었다”고 전했다. 언론에서 ‘카라반’이란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카라반을 세상에 알린 것은 과테말라 언론인 출신 좌파 정치인 바르톨로 푸엔테스와 그의 부인인 인권운동가 두니아 몬토야였다.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온두라스 대통령은 푸엔테스가 정부를 욕보이고 불안정을 조장하기 위해 카라반 행렬을 조직했다고 맹비난했다. 푸엔테스는 《CNN》 방송 등과 한 인터뷰에서 “1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도록 조종하는 게 가능한 일이냐”며 “에르난데스 대통령 치하의 온두라스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태”라고 반박했다.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등 중앙아메리카 북부 3개국 출신 이주민은 지난 10여 년 새 급증했다. 줄을 잇는 폭력 사태와 치안 불안, 극단의 빈곤이 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정치적 격변기를 지나온 온두라스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 배후에 미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과테말라·엘살바도르와 마찬가지로 온두라스와 미국의 본격적인 ‘인연’은 19세기 말~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두라스 북부 카리브해 연안 일대를 무대로 유나이티드프루트를 비롯한 미국 농업자본이 대거 진출했다. 이들은 급증하는 수요에 발맞춰 대규모 바나나 농장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철도와 도로가 건설됐고, 미국계 은행이 들어섰다. 정치권은 뇌물로 흥청거렸다. 바나나와 커피 등 몇몇 농산물에 온두라스 경제가 온통 의존하는 형국에 이르렀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정치·군사적으로 적극 개입했다. 이른바 ‘바나나 공화국’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미국의 정치·군사 개입이 부른 결과 ‘바나나 공화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집단은 군부였다. 미국은 오랜 기간 이들의 든든한 배후였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미국은 그 절정기였다. 온두라스와 이웃한 니카라과에 들어선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를 뒤엎고, 중남미 일대 좌파 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두라스에 미군 병력이 ‘일시적으로’ 배치됐다. 니카라과의 우파 콘트라 반군은 온두라스에서 미군의 훈련을 받았다. 온두라스 군부에 대규모 지원도 이어졌다. 두 나라 군대가 함께 사용하는 합동 기지가 늘어났다. 군부독재의 정치적 탄압도 가중됐다. 온두라스를 탈출해 미국으로 향하는 행렬이 늘기 시작했다. 2005년 11월 대선에서 개혁 성향의 호세 마누엘 셀라야가 당선되면서, 온두라스에도 변화의 바람이 부는 듯했다. 성공한 사업가 출신인 셀라야 대통령은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셀라야 대통령은 집권 이후,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무상교육과 영세 농민 보조금 제도가 도입됐다. 최저임금을 80%까지 올리는 등 개혁 조치가 잇따랐다. 중남미 최빈국으로 꼽히던 온두라스의 빈곤율이 10%포인트 떨어졌다. 이어 집권 3년차인 2008년 들어선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주도하던 중남미 좌파 연대체 ‘볼리바르 대안 연대’(ALBA)에 적극 가담했다. 안팎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2009년 6월28일 기어이 일이 터졌다. 군부 쿠데타였다. 쿠데타군은 민주적인 선거로 집권한 셀라야 대통령을 파자마 바람으로 납치했다. 미주기구(OAS)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한목소리로 온두라스 군부를 비난했지만, 미국만은 예외였다. 미국은 쿠데타를 쿠데타라 이르지 않았다. 쿠데타가 일어난 나라에는 일체의 대외 원조를 중단해야 하는 미 국내법 때문이었다. ‘순교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군부의 방침에 따라 셀라야 대통령은 코스타리카로 강제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은 군부가 사실상 지명한 로베르토 미첼레티 임시 대통령과 정국 안정화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미 국무장관은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이어진 정치적 혼란 속에 미국으로 향하는 온두라스인 행렬이 더욱 늘었다. 쿠데타 이후 온두라스는 빠르게 ‘정상’을 되찾아갔다. 2010년 대선에서 보수 국민당 소속 포르피리오 로보가 당선됐다. 외자 유치를 명분으로 환경 파괴 우려가 큰 초대형 개발 프로젝트가 잇따라 추진됐다. 온두라스 국토의 30% 가까이가 각종 건설이나 광물 개발사업 터로 지정됐을 정도다. 막대한 개발사업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 국토 전역에서 수백 건의 크고 작은 댐 건설 공사가 시작됐다. 개발은 이어졌다. 2013년 대선에서도 국민당은 무난히 재집권에 성공했다. 에르난데스 대통령은 앞선 정부의 노선을 이어갔다. 2009년 쿠데타 이후 사실상 정부 기능이 마비된 농촌을 중심으로 조직범죄가 더욱 활개를 치고 있었다. 미국으로 향하는 코카인 규모가 급격히 늘었다. 미국은 ‘마약과의 전쟁’을 명분으로 온두라스에 원조를 늘렸다. 정부의 부패가 심해질수록 범죄 조직의 폭력도 더욱 거침없어졌다. 온두라스를 떠나는 인파가 더욱 늘었다. 마약 조직에 붙잡히거나 인신매매당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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