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가 삐걱거리면, 남북이 나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정됐던 북-미 정상회담 전격 취소를 발표한 직후인 지난 5월26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두 번째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9월10일 언론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4차 방북 계획을 발표한 게 지난 8월24일,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전격 취소한 게 이튿날인 8월25일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충분한 진전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방북 취소 이유를 밝혔다. 불과 보름 남짓 만에 무엇이 바뀐 걸까? 샌더스 대변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북한의 군사 퍼레이드에서 핵무기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정책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엄청난 성공을 거둬왔으며, 김 위원장의 서한이 이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간 몇 가지 일이 있었다. 미군 유해가 송환됐고, 억류됐던 미국인이 귀환했다.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샌더스 대변인이 언급한 내용은 대부분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 추진 이전에 이미 이뤄진 일이다. 이 밖에 북한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 실험장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을 폐쇄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충분한 진전’이 없다며,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을 전격 취소했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편지와 정권 수립 70주년(9월9일)을 기념해 열린 군사 퍼레이드에서 핵미사일이 등장하지 않은 것을 빼곤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정세 판단’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9월10일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북한이 건국 70주년을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를 했다. 그간 군사 퍼레이드 때마다 선보였던 핵미사일은 없었다. 행사의 주제는 평화와 경제개발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핵미사일을 등장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미국 뉴스 채널 <폭스뉴스>) 이건 아주 크고 대단히 긍정적인 입장이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감사한다. 우리 두 사람이 (우리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이 잘못됐다는 점을 증명할 것이다.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두 사람의 좋은 대화보다 나은 것은 없다! 내가 취임하기 전보다 훨씬 상황이 나아졌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보다 한반도 상황은 분명 나아졌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첫해인 지난해와 견줘보면, 상황은 더욱 극적으로 나아졌다. 지난해 9월3일 북한은 6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9월9일엔 김정은 위원장 주재로 이를 자축하는 대규모 연회를 열었다. 9월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추가 대북제재 결의(2375호)를 채택하기에 앞서 북한 외무성은 성명을 내어 “세계는 우리가 미국이 생각조차 못하는 강력한 행동 조치를 연속적으로 취하여 미국을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최후 수단도 불사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을러댔다. 트럼프의 본능이 대화 분위기 만들다 실제 북한은 지난해 9월15일 미국령 괌을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 12형’ 시험발사에 나섰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9월19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 완전 파괴’ 발언을 내놨고, 김 위원장은 이틀 뒤인 9월21일 국무위원장 명의의 성명에서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 조치’를 경고했다. 미국은 23일 밤 ‘죽음의 백조’로 불리는 B-1B 공중폭격기와 F-15C 전투기를 사상 처음 북한 쪽 동해 공역까지 출동시키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일촉즉발의 나날이었다. “북한에 대해선 지금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본능이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보좌진이다.” 모턴 핼퍼린 전 미국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은 9월11일 한반도 전문매체 <38노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지난해 위기 국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위협과 비아냥으로 일관했다. 무분별했다.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엔 ‘북한의 핵 위협이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성급했다. 그럼에도 핼퍼린 전 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낮추고 비핵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간 사려 깊은 움직임을 보여왔다”며 “더욱 중요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변 보좌진과 의회의 공화·민주 양당, 워싱턴의 외교정책 전문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렇게 행동해왔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주류 외교·안보 전문가 그룹에서 나온 보기 드문 긍정적 반응이다. 핼퍼린 전 실장은 린든 존슨 행정부 시절인 1967년 최연소(당시 29살) 국방부 국제안보 담당 부차관보를 지낸 뒤, 리처드 닉슨·빌 클린턴·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두루 요직을 거쳤다. 그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북-미 협상이) 현재의 교착상태에서 빠져나오려면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 정가에 만연한 회의적 시선을 계속해서 무시할 필요가 있다. 지난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했다는 조건 없는 종전선언을 재확인하고, 북한이 핵·미사일 시험 유예를 지속하는 한 대규모 군사훈련 중단 조처를 유지해야 한다. …대규모 군사훈련 중단 조처는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 중단 조처에 대한 합리적인 양해 조처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가 제안했던 이른바 ‘동결 대 동결’(쌍중단) 조처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간 회의론자들은 북한이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일부 비판이 있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은 근본적인 문제를 풀고, 오랜 기간이 걸릴 진지한 협상을 촉발할 좋은 방안이었다. (6·12 정상회담 이후) 실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북-미는 ‘쌍중단’에 합의했다. 협상으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점도 확인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밝혔고,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북-미 관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지속가능한 평화체제와 체제 안전 보장도 약속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북-미 관계가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임을 확신하는 동시에 상호 간 신뢰 구축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에 인식을 함께했다. 비핵화가 이뤄져야 평화가 올 수 있다던 기존 틀에서 벗어나, 평화로 핵무장의 필요성을 없애면 비핵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에 합의한 셈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실무협상이 시작되자 미국 쪽 태도가 바뀌었다. 핼퍼린 전 실장은 “정상회담 결과를 바탕으로 북-미 양국 외교관들은 두 지도자가 합의한 광범위한 원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보좌진이 대통령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평화 논의에 앞서 비핵화를 요구했다”고 짚었다. 지난 석 달여 북-미 협상이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이유다. 또다시 구원 등판한 문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이 내 임기 안에 비핵화를 원한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월6일 몬태나주 빌링스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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