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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신발 벗고 밥을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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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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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NG 리포트

스물네살 나이에 한국을 떠나 브라질로 오면서 짐보따리에 담아온 것 중에는 눈이 깊숙하고 얼굴 윤곽이 뚜렷한 서양남자와 멋진 연애사건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기대와 환상이 있었다. 결국에는 두루뭉술한 얼굴에 동양인 평균보다 작은 눈을 한 토종 한국남자와 결혼해 살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와서는 서양남자라면 그냥 준대도 별로 탐탁지 않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랬다. 사춘기 시절 넋을 잃고 읽어치우던 순정만화와 가슴 졸이며 보던 할리우드영화의 영향이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

영화배우처럼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인디언 혈통이 섞인 듯한 까무잡잡한 얼굴이 적어도 내 눈에는 섹시하게 보였던 브라질 남자친구가 한명 있었다. 하루는 같이 앉아서 빵에 바르고 얹을 것들을 늘어놓고 간식을 먹던 참이었다. 무심코 사용하던 포크를 마요네즈 병 안에 넣었더니 이 친구가 뜨악한 얼굴을 하는 거였다. “왜 네 입에 넣었던 걸 같이 먹는 음식에 집어넣느냐”면서 정떨어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먹는 일을 가지고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나 싶어서 정작 상대방에게 정이 떨어진 건 나였다.

그 일 때문만은 아니었고 이런저런 다른 사연들로 인해 그 브라질 총각과의 로맨스는 몇달 못 가 종을 쳤다. 새삼 그 해묵은 일을 떠올리는 건 먹는 일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싫어하고 좋아하는 느낌, 거부와 수용의 모양새가 얼마나 다른지를 말하고 싶어서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는 신발을 벗고 책상다리로 밥상에 앉는 것이 제일 편하고 좋은 밥 먹는 자세다. 특히 집안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브라질 사람들에게 식구가 아닌 남과 양말 바람으로 마주앉아 밥 먹는 것은 고역스러운 일이다. “남의 집에 가서 신발을 벗는단 말인가요? 구두를 벗으면 발에서 냄새나잖아요. 그런데 신발을 벗고 그것도 방바닥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고요?”라는 말도 들어봤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날 때>를 보면 여주인공이 식당에 갈 때마다 샐러드 양념을 요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둥 시시콜콜 세부적으로 주문을 하고 남자주인공이 그런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샐리만큼은 아니지만 밥을 사먹을 때 ‘내 먹을 음식은 이렇게 해달라’는 내용의 주문을 덧붙이는 건 한국사람들에게서는 보기 힘들고 브라질 사람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다. 아무리 허름한 식당에서 값싼 음식을 시켜 먹을지라도 ‘내 돈 주고 밥을 사먹는 일’에 따라붙는 당연한 권리다.


일러스트레이션/ 설은영
가끔 친정 나들이 삼아 한국을 방문하면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같이 밥 먹으러 가곤 한다. 한번은 한정식 집을 갔는데 그곳은 코스식으로 반찬 음식을 조금씩 날라서 주다가 마지막에 밥과 국을 주는 곳이었다. 내 개인 취향으로는 한국 음식은 처음부터 밥과 국과 반찬을 다같이 늘어놓고 먹는 게 좋다. 우리 상은 한꺼번에 봐달라고 했더니, ‘우리 식당에서는 그렇게 안 하는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표적인 서비스 산업인 외식업에서도 ‘손님을 왕처럼’ 모시지는 못할지언정 ‘해주는 대로 먹어라’의 심성이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느낀 건 나의 지나친 비약이었을까.

책으로 보는 세계 l <자유에 대한 공격?>

신세계질서의 ‘테러’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독일의 한 출판사는 최근 ‘9·11 테러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주제 아래 일련의 저서들을 선보였다. 이 저서들은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사회 주류집단에서 벗어나 있다는 소외감이 사무친다 해도, 혹은 사회에 대한 작은 비판에도 극단주의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억울하고 살벌한 상황이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은 비판적 논쟁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운동의 정신이다. 2002년 초 세계 17명의 언론인, 문인 그리고 학자들의 짧지만 도발적인 질문과 테제를 모아 출간된 <자유에 대한 공격?>도 이 저서들 중 하나이다.

4명의 미국 언론인들의 글은, 9·11 테러를 “자유, 관용, 복지, 그리고 종교적 다원성과 개인의 자유”로 대변되는 서구적 가치에 대한 아랍권의 증오로 해석하는 미국 주류 언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자기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풍부한 논거와 구체적 자료의 바탕 위에 수백년에 걸친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 정책을 이번 테러의 ‘역사적 연원’으로 설명하며, 이 오래된 서구 제국주의가 어떻게 서구 지식인과 그들의 도덕문화 속에 작용해왔는가를 밝혀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영국 그리고 독일에서 진행된 테러방지법, 사회안전법 등의 법률 변화를 추적하면서, 또 구체적인 개인의 권리 침해와 사회의 ‘군사화’ 경향의 단면들을 제시함으로써, 이 책은 미국 중심의 ‘신세계질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파키스탄 출신 작가이자 언론인인 타리크 알리의 체험담은, ‘부조리’에 가까운 인권침해의 한 예로서 냉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그는 지난해 11월, 독일 뮌헨 공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다 항공사의 자체 안전검사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그가 칼 마르크스의 <자살에 관하여>라는 책을 소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며, 이데올로기적 색채와 그로 인한 ‘따분함’을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의 열정어린 고뇌와 글의 탄탄한 논리성은 물론, 무엇보다 “이런 일이!”라는 감탄 구호를 연발하게끔 하는 풍부한 사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을 만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베를린=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



상파울루=오진영 통신원 ohnong@ig.com.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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