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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는 미국을 연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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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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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언론에 의해 반역자로 낙인찍인 ‘미국인 탈레반’ 린드가 총을 든 진정한 이유

사진/ 아프가니스탄에서 체포된 존 워커 린드. 그의 재판은 9·11테러 1주년이 되는 날에 진행될 수도 있다. (SYGMA)
21세기의 신조어로 ‘미국인 탈레반’이란 말이 생겨났다. 9·11 사건의 부산물인 이 단어의 출현에 많은 미국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초 아프간 북부의 한 옛 요새에서 탈레반 포로들의 무장봉기가 진압된 뒤부터 ‘미국인 탈레반’ 존 워커 린드(21)가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아버지를 변호사로 둔 미 중산층 출신의 젊은이가 그 먼 아프간에서 미국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 수가 있는가. 부시 정권의 세계지배 패권전략이 “힘에 바탕해 제3세계를 희생시키고 미국의 국가이익을 관철시키는 형태의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인식이 없는 보통 미국 시민들로선 린드를 바로 보기 어렵다. 린드의 부모는 그가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었던 ‘희생자’라고 여긴다. 린드의 어머니는 “내 아들이 세뇌를 당한 게 틀림없다”고 말했고, 린드의 옛 친구들은 “무자헤딘과 린드는 거리가 멀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나 21살 청년 린드의 의식세계에선 “나의 투쟁은 정당했다. 미국이 문제다”라는 외침이 메아리친다.

미 정부와의 ‘거래’는 없었다

미국의 지극히 상업적인 언론들 사이에 린드는 ‘반역자’로 각인돼 있다. 소란스런 농담과 과장된 몸짓이 지배하는 TV 토크쇼의 사회자들은 린드를 ‘변절자’(rat)로 깎아 부르곤 한다. 선정성이 떨어지면 안 팔리는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논조도 마찬가지다. “오사마 빈 라덴의 용병”이란 타이틀도 표지를 장식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아프간에 침투시킨 첩자가 아니겠느냐는 식의 추정도 나왔다. 정상적인 미국인이라면 그곳에 있을 리 없다는 식이다. 포로로 잡힌 탈레반 병사들이 무장봉기를 했을 때 CIA 요원 마이크 스판이 죽은 것도 린드 때문일 것이라는 투의 공격도 나왔다. 적어도 그가 CIA 요원 스판의 피살 원인제공자일 것이라는 그럴듯한 분석이다. “린드를 움직인 진정한 동기는 무엇일까. 미국이 뭘 잘못했나”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없다. 지난 1월 아프간 현지취재를 갔을 때 몇몇 미국기자들에게 이런 문제제기를 하자, “어리석은 질문”(stupid question)이란 퉁명스런 대꾸뿐이었다.


린드는 9·11 테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미 검찰은 그가 9·11 테러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가고, 일부 미 언론들도 여기에 합세하는 분위기다. 강경 칼럼니스트들은 린드의 미국 시민권을 박탈해 알 카에다 포로처럼 군사법정에서 단죄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딕 체니 미 부통령은 “미국에서 성장한 사람이 탈레반 및 알 카에다 대원들과 함께 아프간에서 투쟁한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며 린드를 비판했다. 존 애슈크로프트 미 법무장관은 “린드는 테러분자들이 수천명의 미국인을 살해하고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지 않았다”면서 린드를 “자발적인 오사마 빈 라덴 추종자”로 못박았다. 오히려 부시 미 대통령이 너그러운 편이다. 그는 린드를 가리켜 “잘못 이끌려 들어간 불쌍한 친구”(poor fellow)라 했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냉정하다. “우리는 알 카에다, 탈레반 전사들과 함께 감옥 안에서 AK-47 소총을 쥔 미국인을 발견했다. 그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미국은 탈레반 최하급 전사에 지나지 않은 린드와의 ‘거래’를 통해 뭔가 그럴듯한 정보를 끌어내려 했다. 리처드 마이어스 미 합참의장은 린드의 처리문제와 관련해 “최우선 고려사항은 유용한 정보 확보 여부다. 이것이 린드의 최종 법적 신분을 가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기징역까지 가능한 죄목으로 기소된 모양새로 보면, 린드는 그같은 미 당국의 ‘거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귀가 확 뚫릴 만큼의 고급정보는 없더라도, 최소한 빈 라덴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어야 하는데, 린드는 이를 거절한 모양이다. 아프간에서 C-17 수송기에 태워져 워싱턴과 가까운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감옥에 갇힌 린드는 ▷해외에서 미국인을 살해하는 작업을 공모하고, ▷알 카에다 같은 테러조직들을 돕고, ▷탈레반을 이롭게 했다는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린드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식 재판날짜는 의심스럽게도 올 8월 말쯤으로 잡혔다. 그렇다면 재판은 9·11 1주년이 되는 날에 진행될 수도 있다. 린드의 변호인은 “9·11 1주년 추모 열기가 린드에게 불리할 수 있다”며 재판날짜를 더 뒤로 미루자고 요구한 상태다.

잘못된 중동정책에 반기

사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린드의 아버지(가운데). 그는 린드가 '희생자'임을 강조했다. (SYGMA)
린드가 ‘미국인 탈레반’으로 확인된 뒤 <뉴스위크> 등 미 언론사들은 린드에게서 한마디 뭔가를 듣기 위해 치열한 취재경쟁을 펼쳤다. 그저 스쳐가는 식의 짧은 인터뷰를 한 다음 멋대로 린드의 의식세계를 편집해냈다. 부상당한 채 미 CIA의 잇단 심문에 지쳤을 린드가 진지한 자세로 그들 기자들에게 속내를 털어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그나마 몇 가지 편린이 드러난다. “정당한 목적을 위해 싸웠다고 믿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절대로 그렇다”(absolutely)고 밝힌 것이 그러하다. <뉴스위크>와의 짧은 인터뷰에서 린드는 “이슬람 정권을 돕기 위해 아프간에 들어갔다. 탈레반 정권은 이슬람 율법을 시행하는 유일한 정부였다”라고 말했다. 그런 린드의 태도에 애슈크로프트 미 법무장관은 괘씸죄를 적용하고 싶어한다.

초점은 어떤 배경에서 린드가 ‘미국인 탈레반’이 돼 카슈미르에서, 그리고 아프간에서 AK-47 소총을 들고 싸우려 했을까에 모아진다. ‘미국인 탈레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미국의 세속적인 상업문화, 백인 중심사회, 그리고 미국의 일방적인 세계지배 패권전략에 대한 비판과 맞물린다. 81년생인 린드도 한때는 힙합음악에 빠지기도 했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런 린드에게 영향을 준 인물은 말콤 엑스였다고 부모는 믿는다. 그는 행동적인 이슬람 단체를 이끌면서 강한 카리스마와 설득력 있는 논리로 60년대 미국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흑인 사회운동가다. 65년 라이벌 흑인 이슬람단체 요원들 손에 피살당한 말콤 엑스의 일대기를 읽은 16살의 린드는 애써 모은 힙합과 랩 CD를 내다버리고 이슬람 웹사이트에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천주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90년대 중반에 대중화되기 시작한 인터넷이 사춘기 소년 린드의 의식세계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셈이다.

린드가 탈레반 전사가 되기까지 그의 반미 정치의식을 키운 텃밭은 예멘과 파키스탄이었다. 98년 부모가 이혼을 하자, 린드는 예멘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이슬람 교리를 공부하던 린드는 미국의 친이스라엘적인, 세속적이고 부패한 독재국가들과의 유착을 가져온 중동정책에 비판적인 젊은이가 됐다. 아마도 그곳 이슬람 지식인들과의 토론을 통해 “미국이 잘못해도 한참 잘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2000년 10월 예멘에 정박했던 미 구축함 코울호가 자살 폭탄공격을 받아 19명의 미 해군이 죽었을 때 린드는 아버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미 군함이 예멘에 정박하는 것 자체가 (아랍권에 대한) 전쟁행위”라는 내용이었다. 린드가 파키스탄에서 부모에게 보낸 이메일을 보면 이제 20살이 된 미국의 젊은이가 자신의 조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미국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것은 좋지만 미국은 정말이지 다시 보고 싶지 않다”(2001년 2월), “파키스탄에서 살아보니 미국 사회를 정말 연민으로 보게 된다”(2001년 4월).

젊은 이상주의자의 외침

린드는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지대에 자리한, 카슈미르 무장조직이 운영하는 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2001년 봄 한때 인도령 카슈미르로 넘어가 인도군에 맞서 ‘자유전사’(freedom fighter)로 싸우기도 했다. 올해 1월 필자가 카슈미르에 갔을 때 만난 그곳 젊은이들은 린드를 매우 우호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린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아프간에 들어갔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아프간 알 카에다 훈련캠프에서 린드는 오사마 빈 라덴도 만났다. 특수훈련을 받고 테러리스트로 될 것인가, 아니면 일반 무자헤딘(전사)으로 갈 것인가의 선택에서 린드는 후자를 택한 것으로 알려진다. 린드가 9·11 사건 같은 대형 테러를 찬성할 만큼 극렬한 투쟁가였다는 흔적은 없다. 분명한 것은 세속적인 미국문화의 문제점과 강대국으로서의 횡포에 눈을 뜨게 된 린드가 이슬람권의 반미투쟁에 실천적으로 동조했다는 점이다. 그는 아프간 탈레반 정권과 오사마 빈 라덴의 노선은 도덕성을 지녔다고 여겼던 것 같다. 이슬람적 이상을 추구한 스무살의 젊은이로서 샤리아(회교율법)가 아프간 땅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고 싶어했을 것이다. 프랑코 장군의 파시즘에 맞서 30년대 스페인 내전에 자원했던 국제여단의 이상주의자들 같은 모습이 바로 린드가 아닐까.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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