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점령군’의 멍에를 벗어라

397
등록 : 2002-02-20 00:00 수정 :

크게 작게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복무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 급속히 확산

사진/ 이스라엘 야스라트 군 형무소 앞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시위를 벌이는 시위대. 현재까지 병역거부로 구류 이상의 처분을 받고 군 형무소에서 복역한 현역·에비역의 수는 46명에 이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 지금은 전시가 아닌가. 적 앞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범죄다.” “점령은 우리 모두를 죽이는 행위이다. 점령지의 소수 정착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국가안보라 할 수 있는가.”

지금 이스라엘은 논쟁중이다. 국가안보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논쟁의 불길이 거세다. 군 문제만큼은 평등한 제도를 가졌다는 이스라엘에서 병역거부 논쟁이 일고 있다는 것이 의아스러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상대로 테러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기도 했고, 지금도 끊임없는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을 겪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일부 장성 출신도 지지 발언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병역 의무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현역 복무를 면제받는 정통파 유대인들처럼 대체복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아니다. 병역거부자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내 근무를 거부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 동원 예비군과 현역병 일부가 양심을 이유로 요르단강 서안 등 팔레스타인 지역 내에서의 복무를 거부해 파문을 일으켰다. 물론 이들은 법의 제재를 받는다. 이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에 동참할 의사를 비추고 있는 현역과 예비역 장·사병들의 수는 1천여명에 육박하고, 일반 시민 지지자들도 3천여명이 훨씬 넘고 있다. 이들은 “인간에 대한 지배와 축출, 굶주리게 만들고 모욕을 안겨주는” 전쟁을 위해 더이상 싸우지 말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병역거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간의 유혈분쟁이 장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발생한 것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찬성하는 쪽은 점령지에서의 군 경계 근무에 투입되는 것은 도덕성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의 사명은 적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것인데, 점령지 내의 주민들을 통제하는 점령군으로 복무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군의 사명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이스라엘군은 국가 보위를 사명으로 할 뿐, 정착민들의 사병이 아니라고 외친다.

시민운동으로까지 확대된 이스라엘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일반 시민들의 특정한 움직임으로 머물지 않고 그 지지자들의 범위와 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이스라엘의 국내담당 정보기관인 신베트의 국장을 지낸 아미 아얄론이다. 메레츠당의 당수를 지낸 슐라미트 알로니, 전직 해군 제독으로 신베트의 국장을 지낸 아미 아얄론 장군 등도 대표적이다. 이들은 병역거부 운동에 전적으로 아니면 부분적으로 동감을 나타내고 있다. 아미 아얄론은 이스라엘TV와의 회견에서 “이스라엘군이 무장도 하지 않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살상하고 있는데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다”며, 현역병사들은 명백한 불법명령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예비군들이 가자지구나 요르단강 서안 유역에서의 동원복무를 거부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유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과 관련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이스라엘군과 정부당국이다. 이들은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에 대해 “양심적 행동을 주장하지만 이들(병역거부자들)의 의도는 다분히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군당국은 “이들의 행동은 적과 대치된 상황에서 반란이나 마찬가지다”라는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즉각적 서명중단 및 지시 이행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문제와 관련 아리엘 샤론 총리는 “군에 대한 비판론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 종말”이라며 집단행동 확산방지에 나서고 있다. 인터넷 등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반대서명 운동까지 일어나 이미 서명자가 5천여명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으로 번진 논쟁

사진/ 이스라엘 현역병들은 고등학교 졸업 뒤 3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나면 일년에 한달간 동원 예비군으로 현역에 준하는 근무를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들이 점령지역 내의 정착촌 경계근무에 투입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병역제도는 독특하다. 남녀 모두 18살이 되면 병역을 치러야 한다. 복무기간은 남자 3년, 여자 2년이다. 현역 복무 뒤 남자는 55살, 여자는 50살까지 예비역에 편입돼 매년 1개월 이상 군복무를 하여야 한다. 현재 예비역들은 도로통제 작전이나 점령지구 내의 유대인 정착촌 경계업무 등에 주로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 지지자들의 운동은 사이버 공간으로까지 점화되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운동단체인 ‘예쉬 그불’(www.yesh-gvul.org)의 사이트나 ‘거부의 용기’(www.seruv.org) 사이트는 물론 다양한 지지 카페들이 생기는가 하면 이를 매국행위로 반박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논란 이상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시민단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쉬 그불’(국경이 있다)로 최초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위한 시민운동 단체이다.

민감한 시기에 커져가는 이번 사건의 파장은 의미심장하다. 이스라엘은 현재 샤론 정부의 강경일변도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회의론이 증가하고 있다. 이번 양심적 병역거부 움직임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2월 초 이스라엘 라디오 방송이 밝힌 여론조사에 의하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지지여론이 31%에 달하고 있다.

예쉬 그불은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군내에 확산시키기 위하여 현역병뿐만 아니라 군 입영을 앞둔 청소년들과 예비역, 일반인을 대상으로 병역거부 운동 안내 유인물을 돌리는가 하면 직통 라인을 개설하여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로 고민하는 현역군과 예비군들에게 행동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의 도움으로 이미 400명이 넘는 현역병들과 200명이 넘는 예비역들이 병역거부 선언을 했다. ‘거부의 용기’ 사이트에는 250여명 정도 되는 거부 운동 참여자들의 명단이 공개되어 있다. 3천여명의 일반 시민 지지자들의 명단도 공개된 상태다. 시민단체들은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일반 시민들에 대한 지지 서명운동을 계속 벌이고 있다.

필자는 몇 차례 인티파다(봉기) 현장을 취재하면서 팔레스타인 점령지를 경비하던 아랍계 이스라엘 병사의 긴장된 눈빛을 보았다. 동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그 젊은이들의 갈등이 우리의 쓰라린 경험과 그리 멀지 않았다.

예비군에서 사병으로 확대

사진/ 동예루살렘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이스라엘 병사들. 이들은 팔레스타인 행인들에 대한 몸수색을 포함한 일상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라말라 지역 복무를 거부한 혐의로 예비역 육군 중위 다비드 에녹은 25일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는 3주 동안 정착민들을 보호하고 호위하는 임무를 거부한 혐의를 부인했다. 예비역 육군 상사 아비노암 클레인 28일 구류, 중위 아디 에일라트 18일 구류, 야일 킬로우 18일 구류, 야일 할페르 28일 구류, 레오니드 크라스네르 4개월 복역….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움직임은 갈수록 증폭되면서 군 형무소 수감생활을 마다 않는 현역·예비역이 증가하고 있다. 아디 에일라트는 “군복을 입고 점령지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믿을 수 없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현재까지 병역거부 혐의로 구류처분 등을 받은 현역과 예비역의 수는 46명이다. 이스라엘 동원 예비군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병역거부 움직임은 이제 현역 사병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예쉬 그불의 국제담당 페레츠 키드론은 “평화운동의 미래는 현재의 상황에서 매우 어렵게 보인다. 그렇지만 평화운동은 성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의 확산은 이미 이스라엘 안의 새로운 중요 변수로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당국과 정부는 어떠한 이유로든 국가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 병역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를 완강히 고수하고 있다. 인티파다는 이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을 넘어서서 이스라엘 내의 가장 민감한 사안인 국가안보 논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팔 간의 평화 정착이 이뤄지기까지 ‘이스라엘판’ 양심적 병역거부 논쟁은 계속 사회적 논란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암만=김동문 통신원 yahiya@hanmail.net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