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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최악의 ‘적’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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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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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네크워크 2002 아시아 뉴 트렌드 인도

국경 넘어오는 파키스탄 무샤라프 장군의 다원주의와 비종교주의적 문제의식

많은 인도 시민들은 자신들이 사회적·문화적 또는 정치적으로 남아시아를 주도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럴듯하긴 하다. 비교하자면, 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토와 인구를 지닌데다, 지난 반세기 동안 상대적으로 민주주의의 안정도라든지, 종교적 다원주의 같은 것에 대한 가치를 지녀왔기 때문이다. 사회·문화적으로도 아룬다티 로이, 아말티아 센 그리고 메다 파트칼 같은 몇몇 빼어난 문인들의 성취가 돋보이는 게 사실이다.

네루 시대의 목표, 왜 퇴각했는가


그러나 이젠 이런 인식에 대한 근본적 수정을 해야 할 시간이 왔다는 의견이 늘고 있다. 이들은 인도가 그동안 잘난 체해왔던 비종교주의와 다원주의뿐만 아니라 국가안보와 ‘그레이트 파워’ 주장에 대해서도 공격을 시작했다.

2002년은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유행처럼 주도해나갈 시민들이 돋보이는 한해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공교롭게도 이런 유행은 최악의 적이라고 여겨온 파키스탄으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유행의 중심 대목은 인도가 지금처럼 간다면 결국 문화적 편협성과 비근대적 파벌주의로 침몰하고 말 것이라는 건데, 적국 파키스탄은 이미 그 반대방향으로 길을 떠나기 시작했으니 파키스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파키스탄은 지난 1월12일 군인정치가 무샤라프 대통령의 연설로 극적인 변화를 맞으며 이미 길을 떠났다. 과거와 근본적인 단절을 선언한 그 내용에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 군부와 종교지도자의 관계 그리고 이슬람과 테러리즘의 관계가 모두 담겨 있었다.

만약 무샤라프가 ‘케말 아타툴크’라 부르는 이 야심적인 비종교주의화와 근대화 계획을 반쯤만 성공시킨다고 해도, 파키스탄은 종교적 정체성을 지닌 채 개방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편안한 사회로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건 1947년 인도로부터 종교적인 선을 따라 분리된 파키스탄이 지고 있던 무거운 유산을 스스로 극복하는 일이 되는 셈이기도 하다.

비종교주의적 근대화는 일찍이 1947년 자와하를랄 네루의 주도 아래 독립할 당시 인도가 스스로 약속했던 국가적 목표였고, 그로부터 한 20년 정도는 제법 성취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도는 그 목표로부터 점차 후퇴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지속적인 빈곤 아래 시장경제와 농노제에 대한 탐닉으로 불평등이 판치는 교조주의적인 사회가 되고 말았다. 이 퇴각의 가장 극단적 경우는 지난 4년 가까이 인도를 주무르고 있는 힌두광신주의 바라티야 자나타당(BJP)의 등장에서 잘 드러났다. 이들의 정치적 배경은 인종과 종교에 대한 차별주의일 뿐, 자신들이 외치는 자유주의도 민족주의도 결코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바라티야 자나타당은 치명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들은 선거와 정치적 이념에서 모두 상당한 부분을 상실해가고 있는 추세인데, 시민들이 바라티야 자나타당의 멍청한 정부 운영과 인기없는 극우정책을 거세게 몰아붙이며 사회정의와 다원주의 그리고 비종교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정당을 찾아나선 탓이다. 이런 가운데 무샤라프의 파키스탄이 추구하기 시작한 다원주의와 비종교주의는 이제 인도 국경을 넘어 인도사회와 정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를 명령하고 있는 셈이다.

스리랑카·방글라데시 변화의 기폭제 될 수도

사진/ 인도는 과연 문화적 편협성과 비근대적 파벌주의로 침몰하고 말 것인가. 그 반대방향으로 가겠다는 '적국'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의 연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AFP 연합)
인도가 만약 이 시대적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스리랑카가 타밀 분리독립투쟁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또 방글라데시가 다원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데 기폭제가 되면서 남아시아 전체의 변화를 추동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2002년, 인도의 많고 많은 시민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인도의 성취와 실패를 투영해볼 것이고, 그런 가운데 종교적 차별성을 배경으로 삼은 부적절한 정치판을 노려보게 될 것이다. 또 많은 시민들은 기본적으로 배고픔과 빈곤이 부른 불평등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2002년은 인도-파키스탄 분쟁이라는 험상궂은 주제를 안고 시작되었지만, 정직한 자기 반성과 양심적인 행동이 전통적인 적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민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정부가 모든 국가적 문제를 국경 너머의 테러리즘에 책임을 떠넘기는 일에도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인도의 2002년 사회적 유행은 비종교주의와 다원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 찾기’에 집중될 것이다.


프라풀 비드와이(Praful Bidwai)
전 <타임 오브 인디아> 편집장·핵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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