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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본다, 그러나 안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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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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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네크워크 2002 아시아 뉴 트렌드 싱가포르

광적인 쇼핑광들을 ‘윈도 쇼핑’에 만족하게 하는 최악의 불경기와 최고의 실업률

사진/ 싱가포르 시민들은 과연 마음껏 쇼핑하지 못하면서도 예전처럼 정치적 압박을 견뎌낼 수 있을까?(Eunice Lau)
지난 크리스마스 시즌, 싱가포르의 쇼핑센터는 시민들로 넘쳐났다. 고급 시계로 유명한 니안시티는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렸던 시민들이 돌아나올 때는 대부분 빈손이었다. 텅 빈 지갑이 문제였는데, 이건 시민들이 시계를 살 형편은 아니더라도 최신 모델을 구경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풍경이었다.

‘내핍’은 최대의 화두


“최악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구경만 할 뿐이다.” 2000년의 크리스마스와 비교하며 울상을 짓는 시계점 주인의 말이었다. ‘쇼핑광’ 싱가포르 시민들에 대한 악명 높은 이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요즘은 그저 ‘윈도 쇼핑’만 판치고 있는 실정이다. 최악의 불경기와 최고의 실업률이 지난해 중순부터 밀어닥친 탓이다.

싱가포르 시민들 사이에는 해고에 대한 불안감도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이러다보니,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지난 20년간 고도성장기에 물든 소비풍조를 없애는 일에 혈안이 되고 있으며, 내핍을 화두처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가정들에서처럼, 빅터 세(40)도 휴가철의 해외여행과 외식을 자제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구입하지 않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런 현상들은 올 한해 내내 싱가포르을 지배하는 무거운 화제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마다 진단을 내려 사회를 더욱 어둡게 만들어놓았다.

세계화를 축으로 지역경제의 불확실성을 살포하고 있는 최근의 경제불황은 순환적인 현상이거나 또는 단기간에 치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이 진단이라 시민들은 갈팡질팡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지난해 총선에서 승리한 집권여당인 인민행동당(PAP)이 내놓은 핵심 처방전이란 건 기껏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에 반대하는 요소들을 찾아내겠다는 발상뿐이다.

이런 가운데 고촉통 정부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활동했던-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을 포함해서- 인물들을 새 정부에 포진시키며 시민들을 달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별로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의회가 비판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 정치구조 속에서라면 말이다. 그동안, 입 다물고 있은 대가로 정부가 던져주는 달콤한 ‘사탕’을 20년도 넘게 받아 먹어온 싱가포르 시민들에게 그 사탕말고는 달리 처방전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경제만 살려놓으란 말이야.”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택시운전사는 거침없이 불만을 쏟아놓는다. “정치, 그건 자신들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알아서 하란 말이지. 우린 정치 같은 건 관심없어. 경제만 잘 굴러가면 되는 거야. 정부가 시민들에게 그렇게 교육시켜왔잖아.”

심각하다. 이제부터 고촉통 정부가 싱가포르 시민들을 어떻게 이끌고 갈는지, 예전 같지가 않다. 예전이란, 경제가 좋아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던 시절을 뜻하는데, 언제까지 시민들이 윈도 쇼핑만을 즐길 수 있을지가 정말 문제다. 광적으로 쇼핑을 해왔던 시민들이 하루아침에 윈도 쇼핑만을 하게 된 이 현실의 끝은 어디일까? 이민사회인 싱가포르의 미래는 과연 어디일까? 시민들이 마음껏 쇼핑하지 못하면서도 예전처럼 정치적 압박을 견뎌낼 수 있을까?

‘싱가포르 드림’은 모래성이 될 것인가

결국, 많은 싱가포르 시민들은 지금 고촉통 정부가 기로에 서 있다며 경고를 보내고 있다. 정치- 싱가포르에서는 고촉통 정부를 뜻하는- 가 스스로 개혁되지 않은 채, 시민들의 내핍만을 강조한다거나 이에 따라 시민들이 윈도 쇼핑에만 매달려 간다면 ‘싱가포르 드림’은 모래성이 될 수도 있다고.

싱가포르에선 ‘세계 최고의 부국’이니 ‘세계 최고의 환경’ 같은 구호들이 쑥 들어갔다. 시민들이 쇼핑센터의 윈도에만 어슬렁거리는 요즘엔 말이다. 2002년, 싱가포르의 유행은 누가 뭐래도 ‘윈도 쇼핑’이다. 쇼핑센터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싱가포르에서.


유니스 라오(Eunice Lau)
<스트레이츠 타임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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