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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당신은 무슨 커피를 마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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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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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네크워크 2002 아시아 뉴 트렌드 필리핀

‘스타벅스’를 마실 돈이 있는가… 맥주 대신 새로운 신분의 상징처럼 떠올라

80년대와 90년대 필리핀을 상징했던 건 농구와 정치 그리고 맥주가 아니었던가 싶다. 특히 맥주의 경우, 당시 한 경제전문가가 필리핀 경제의 상승과 하강은 산미구엘맥주 소비량으로 측량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다. 필리핀에서 맥주는 사회적 행위의 중요한 도구가 되어왔다는 뜻인데, 친구들과의 사소한 언쟁을 해결하는 자리든 또는 격렬한 정치적 토론의 장이든 가리지 않고 맥주는 함께해왔다.

‘식민지 근성’ 비판하는 이들도


그러나 얼마 전부터는 커피가 맥주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다. 적어도 도시의 엘리트나 중산층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전에는 마닐라의 몇몇 카페에 그저 예술가니 작가, 방랑자, 기자 같은 이들이 드나들 뿐이었는데, 요즘은 대학생들이나 도시의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주부들의 발걸음도 잦아지고 있다. 이러다보니 휘황찬란한 카페들이 마닐라뿐만 아니라 세부나 다바오 같은 지방에서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특히 1997년 마닐라에 첫 문을 연 미국 시애틀 출신의 ‘스타벅스’ 커피가 최근에는 지점을 15개나 늘렸고, 한편으로는 스타벅스에 대항하는 시애틀의 또다른 커피체인점인 ‘베스트커피’가 들어와 2004년까지 최소한 40개의 지점을 열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 일이 이쯤 되다보니, 레스토랑에서도 이제는 원두커피나 에스프레소, 카페오레 같은 별난 커피들이 주메뉴로 등장했다. 커피가 없으면 마치 완전한 식단이 되지 않기라도 하는 양, 이제 커피의 원산지를 따지는 게 마치 사회적 품위를 나타내는 잣대처럼 돼버렸다.

무선전화기처럼 어디에서든 부딪히는 이 카페들을 두고 필리핀의 많은 시민들은 새로운 유행이라거나 또는 통용기호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커피숍이 지명을 가리킬 정도인 프라하나 에소프레소를 사랑하는 이탈리아만큼 열광적이지 않더라도, 시민들 사이에 마닐라의 카페문화가 시들지 않을 것이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따지고보면, 필리핀도 한때 커피의 전통을 강하게 지녔던 곳이 아닌가. 요즘과 같이 현란하게 장식한 카페들이 마닐라 곳곳에 생겨나기 훨씬 이전인 미국 침략기에도 정치가들이나 언론인들이 드나들었던 ‘톰스 딕시 키친’ 같은 곳이 있었다. 미군들이 여름 휴양지로 즐겨 찾았던 바기오시에 자리잡은 2차대전 이전의 카페들이나, 60∼70년대 대항문화를 생산했던 말라테의 ‘카페 브라보’와 ‘카페 아드리아티코’ 등은 아직도 명맥을 잇고 있다. 1700년대부터 필리핀이 자체 생산해온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 커피 ‘바라코’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하지만 최근의 커피 열풍에 관해 ‘식민지 근성’을 드러낸 불쾌한 문화라고 질타하는 이들의 소리를 귀담아들을 필요도 있다. 실제로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은 세계 17번째쯤 되는 커피 생산국이었다. 그걸 정부가 환금작물로 전환하라고 부추긴데다 영농기술은 점점 낙후되고, 커피농장들이 모두 공장부지로 변하면서 결국 ‘바라코’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대신 스타벅스니 베스트커피 같은 외국의 커피체인점이 필리핀을 점령한 것이다.

가난한 자들 위로하는 ‘네슬러’

사진/ 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급속히 퍼지고 있는 '스타벅스' 커피전문점. 필리핀에서는 '스타벅스' 정도는 마셔야 중산층과 지식인 대접을 받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다.(SYGMA)
더구나 외국의 커피체인점들이 필리핀을 ‘멋진 시장’으로 분류한 까닭을 알고나면, 차마 부끄러워 고개를 못들 지경이 되고 만다. 멋진 시장, 이건 필리핀 시민들이 진한 커피를 마셔온 전통 때문이라기보다는 시민들이 지닌 감수성 탓이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미국의 생각을 매우 잘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놀림거리에는 아랑곳없이 커피가 신분을 상징하기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문제는 문제다. 특급호텔의 커피들이야 일반 시민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라 치고, 적어도 스타벅스나 베스트커피 정도는 마셔야 중산층에 끼고 지식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한잔에 35∼95페소(800∼2천원)인데, 문제는 하루 임금이 150페소에도 못 미치는 시민들이 수두룩하다는 데 있다.

물론 먼발치에서 스타벅스를 바라보는 이들, 커피 열풍의 환상을 좇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길은 있다. 스타벅스의 1/4 가격으로 인스턴트 카푸치노를 내놓고 돈을 쓸어가는 다국적 식품기업 ‘네슬러’ 같은 것들이 있는 한….

19세기 프라하와 파리의 커피숍들을 가득 채운 이들이 사실은 노동자계층이었다고 하는데, 2002년 마닐라의 커피숍은 귀족들의 유흥장이 되고 있다.


마리테스 시손(Marites Sison)
전 <마닐라타임스> 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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