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생 로랑, 그 치열한 44년의 투쟁… 상업화의 외길로 치닫는 패션계를 떠나다
1월22일 화요일 저녁, 파리의 퐁피두센터는 사방팔방으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바리케이드 저편으로 웅장한 분홍색 장식대들이 조명을 받아 현란하게 비치자, 그 유명한 이니셜마크 ‘YSL’을 한참 동안 내보내던 대형스크린에 이니셜의 당사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2002년 봄·여름 오트 쿠튀르 패션쇼가 개최되려는 그 순간이 여느 때 같지 않은 건, 바로 그의 마지막 패션쇼라는 점. 그래서 떠나가는 위대한 예술가가 남겨놓는 흔적과 아쉬움과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해 서슴지 않고 모여든 이들이 옥내외에 진을 치고 있었다. “여성에게 서비스한 나의 모험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그의 표현처럼 패션의 역사와 한 예술가의 모험이 또 한 단락 종말을 고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행동하는 여성과 함께
이브 생 로랑이 패션계를 떠난다고 발표한 건 지난 1월7일이다. 44년의 디자이너 경력 중 40년(1962∼2002)을 자신의 고유메이커 ‘이브 생 로랑’으로 세계의 여성들을 입혀온 그는, 그냥 디자이너가 아니라 진정한 예술가로 평가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은퇴소식은 프랑스 언론들의 1면을 장식했다.
“제가 하고자 했던 건 패션을 통해 자아를 만족하려는 이들의 환상에 응하는 대신, 나 자신을 여성의 입장에 이입시켜 그들의 몸, 제스처, 태도, 그리고 그들의 삶에 서비스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바람은 지난 세기 동안 생겨난 여성자유운동에 그들을 동반하려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월7일 은퇴선언 기자회견에서 그가 고한 긴 이별사의 한 대목이다. 진열된 여성이 아닌 살아서 행동하는 여성과 함께해온 이브 생 로랑의 44년 경력은 천과 의상의 역사만이 아니라 20세기 후반기 내내 격동의 세월을 겪어온 여성들의 또다른 역사이기도 하다. 본명이 이브 마티유 생 로랑인 그는 1936년 알제리의 오랑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했다. 18살의 젊은 나이로 크리스티앙 디오르 문하에 들어가 인정을 받고 1957년 디오르의 사망과 함께 디오르를 계승했다. 20살에 맞이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영광이었지만 그의 재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었다. 그러다 1960년 영장을 받고 입대하는데, 동성애자인 그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악몽의 생활이었기에 결국 신경쇠약으로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디오르’에 다시 들어갈 수 없었던 그는 이후 평생의 동반자가 될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자신의 고유메이커인 ‘이브 생 로랑’으로 데뷔한다. 1962년 ‘이브 생 로랑’의 상표로 처음 패션쇼를 가지고, 1966년에는 ‘프레타포르테’(기성복)를 시작한다. 1998년 월드컵축구 결승전 당시 300명의 모델과 함께 프랑스축구장에서 이브 생 로랑의 대형 패션쇼를 개최한 것은 그의 예술세계가 프랑스의 자부심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미국의 팝예술가 앤디 워홀을 좋아한 이브 생 로랑은 은퇴한 뒤 여행과 함께 쓰기, 그리기 작업에 몰두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다고 한다. 44년의 창작생활, 그것도 매년 두 차례씩 탄생시키고 죽여야 하는 패션유행을 창조하는 혹독한 창작활동. 그것은 유행의 현란함을 만들어내기까지 그 패션을 걸치는 일반인이 상상하기조차 힘든 잔혹한 투쟁일 것이다. 오트 쿠튀르(유명디자이너가 있는 점포)의 탄생은 1857년 파리로, 워스가 실제 모델을 이용하여 고객을 상대로 맞춤옷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다. 일종의 고급양장인 오트 쿠튀르는 고객의 대호응을 얻어 의상의 산업화를 예고했다. 그와 함께 오트 쿠튀르의 근원지인 파리는 세계패션의 중심지로 자리했다. 1930년대 런던을 시작으로 뉴욕 등지에서 남성패션이 시작됐지만, 파리는 여성 오트 쿠튀르의 세계중심지로 건재하며 샤넬, 발랑시아가,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패션계의 세기적 대가들이 맹활약하는 무대가 되었다. 오트 쿠튀르의 고립, 프레타포르테의 상업화
그러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이르러 서구의상계에 또다른 물결이 몰아친다. 다름 아닌 ‘의상군중’의 출현이다. 이제는 개인마다 맞춰 입는 옷재단 방식으로는 그 엄청난 군중을 매일 입힐 수가 없었다. 오트 쿠튀르가 아닌 다른 유형의 의상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런 환경을 배경으로 해 프레타포르테가 출현했고, 프레타포르테는 산업화와 현대화에 힙입어 의상의 민주화를 실현하기에 이른다.
‘누구나 입을 수 있도록 미리 만들어진 의상’을 뜻하는 프레타포르테는 애초 오트 쿠튀르를 모방하면서 시작하여 1960년대부터 현저히 시장을 넓혀가다가 서서히 오트 쿠튀르의 자리를 점령해갔다. 이에 발맞춰 1960년대 영국·이탈리아·미국, 1980년대 일본 의상계가 현저히 부각되었다. 오트 쿠튀르의 명성을 지켜오던 파리는 런던, 밀라노, 뉴욕, 도쿄와 더불어 패션산업계의 치열한 경쟁도시 중 하나로 바뀌어갔다.
이제 오트 쿠튀르를 담당해오던 파리의 유명메이커들은 의상 군중을 염두에 두며, 메이커의 생존을 위해서 프레타포르테를 병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브 생 로랑도 의상실 개장 직후인 1966년부터 프레타포르테를 병행했다. 이런 와중에 수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수익성 있는 프레타포르테에 입문하면서 프레타포르테 시장은 날로 성장해갔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각 메이커들은 고객 유치 노력과 함께 액세서리, 화장품 등의 상업화에 나섰다. 토털패션의 상업화뿐 아니라 패션계의 모든 것들이 상업화 물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디자이너와 톱모델들이 상품처럼 팔리는가 하면, 패션잡지들은 우후준순 생겨나 상품화 물결을 한층 더 부추겼다. 패션은 이제 민주화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기엔 지나치게 상업성을 띠기 시작했다. “90년대부터 패션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를 생각하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환상에 불타오르는 이들이 패션계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이브 생 로랑의 발언은 바로 이런 현실을 적시하고 있다.
한편 일년에 두번씩 컬렉션에 참가해 50벌 이상의 맞춤의상을 선보이고, 적어도 20명 이상의 고용인과 함께 파리에 본사를 두고 활동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참가조건을 내거는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고객이 전세계에 걸쳐 150∼200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별천지’에 사는 이들을 위한 옷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을 씁쓸하게 소화하고 있다. 지난 세기말 오트 쿠튀르의 정체성에 대한 반문이 거듭되면서 과연 21세기를 넘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론까지 제기된 바 있는데, 무사히 21세기까지 도착하긴 했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탈퇴선언을 하는 디자이너들이 늘어가고 있다. 90년대의 파코 라반이나 니나 리치의 이별선언에 이어 이브 생 로랑까지 은퇴선언을 하며,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미를 위한 투쟁은 서글프다
이브 생 로랑의 은퇴소식을 접한 이들은 처음에 병, 나이, 예술가의 한계 등을 떠올렸다. 세대교체가 잦은 패션계에서 그는 최전선에 남아 활동하는 보기 드문 고령의 예술가였기 때문에 은퇴 사유에 대한 추측도 무성했다. 1998년부터 ‘이브 생 로랑’에 불어닥친 재정적인 변화도 은퇴요인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이다.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 커플이 근 40년간 이끌어오던 기업체인 ‘이브 생 로랑’을 1999년 프랑스의 대유통기업 ‘피노-프렝탕-르두트’그룹이 인수하면서, 이 둘은 연봉(762만유로)을 받는 봉급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용기있는 결단이다. 자유롭고 싶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그는 떠나가는 것이다. 더이상 주인이 아니면서 그의 이름으로 창작물을 내놓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아픔은 참기 힘든 것이다.” 디자이너 쿠레즈의 말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우리는 무질서와 쇠퇴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아함과 미를 위한 투쟁은 몹시 서글프게 보였습니다. 마치 그 세계의 한켠으로 밀려나 완전히 혼자 된 듯한 기분이지요. 그래서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은 은퇴동기와 관련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월22일 패션쇼의 막을 내리는 그의 외로움은, ‘자연적 고유미’를 창조하려 피땀을 흘리다 잠시 고개를 들어 바라본 세상이 온통 ‘성형미인’으로 북적대고 있는 현실에 대한 혐오와 고독이 아니었을까.
파리=이선주 통신원 oseyo@libertysurf.fr

사진/ 이브 생 로랑의 예술활동을 기리기 위해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파리의 라파이에트 백화점은 쇼윈도에 이브 생 로랑의 작업실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이선주 통신원)
“제가 하고자 했던 건 패션을 통해 자아를 만족하려는 이들의 환상에 응하는 대신, 나 자신을 여성의 입장에 이입시켜 그들의 몸, 제스처, 태도, 그리고 그들의 삶에 서비스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바람은 지난 세기 동안 생겨난 여성자유운동에 그들을 동반하려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월7일 은퇴선언 기자회견에서 그가 고한 긴 이별사의 한 대목이다. 진열된 여성이 아닌 살아서 행동하는 여성과 함께해온 이브 생 로랑의 44년 경력은 천과 의상의 역사만이 아니라 20세기 후반기 내내 격동의 세월을 겪어온 여성들의 또다른 역사이기도 하다. 본명이 이브 마티유 생 로랑인 그는 1936년 알제리의 오랑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했다. 18살의 젊은 나이로 크리스티앙 디오르 문하에 들어가 인정을 받고 1957년 디오르의 사망과 함께 디오르를 계승했다. 20살에 맞이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영광이었지만 그의 재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었다. 그러다 1960년 영장을 받고 입대하는데, 동성애자인 그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악몽의 생활이었기에 결국 신경쇠약으로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디오르’에 다시 들어갈 수 없었던 그는 이후 평생의 동반자가 될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자신의 고유메이커인 ‘이브 생 로랑’으로 데뷔한다. 1962년 ‘이브 생 로랑’의 상표로 처음 패션쇼를 가지고, 1966년에는 ‘프레타포르테’(기성복)를 시작한다. 1998년 월드컵축구 결승전 당시 300명의 모델과 함께 프랑스축구장에서 이브 생 로랑의 대형 패션쇼를 개최한 것은 그의 예술세계가 프랑스의 자부심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미국의 팝예술가 앤디 워홀을 좋아한 이브 생 로랑은 은퇴한 뒤 여행과 함께 쓰기, 그리기 작업에 몰두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다고 한다. 44년의 창작생활, 그것도 매년 두 차례씩 탄생시키고 죽여야 하는 패션유행을 창조하는 혹독한 창작활동. 그것은 유행의 현란함을 만들어내기까지 그 패션을 걸치는 일반인이 상상하기조차 힘든 잔혹한 투쟁일 것이다. 오트 쿠튀르(유명디자이너가 있는 점포)의 탄생은 1857년 파리로, 워스가 실제 모델을 이용하여 고객을 상대로 맞춤옷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다. 일종의 고급양장인 오트 쿠튀르는 고객의 대호응을 얻어 의상의 산업화를 예고했다. 그와 함께 오트 쿠튀르의 근원지인 파리는 세계패션의 중심지로 자리했다. 1930년대 런던을 시작으로 뉴욕 등지에서 남성패션이 시작됐지만, 파리는 여성 오트 쿠튀르의 세계중심지로 건재하며 샤넬, 발랑시아가,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패션계의 세기적 대가들이 맹활약하는 무대가 되었다. 오트 쿠튀르의 고립, 프레타포르테의 상업화

사진/ "우리는 무질서와 쇠퇴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 패션쇼 무대에 선 이브 생 로랑.(SYG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