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착자 없으면 못 자?
등록 : 2002-01-23 00:00 수정 :
외국 살면서 겪는 어려움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말이 안 통해서 생기는 문제들이다. 남의 땅에서 그 나라 말을 못하는 외국인은 멀쩡한 어른이라도 속절없이 코흘리개 어린애만 못한 신세가 되게 마련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생각해보면 자기 땅에 사는 외국 사람(정확히 말해서 서구의 백인)이 한국말을 좀 유창하게 하는 걸 보고 신기해하며 놀라 넘어가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밖에 없지 않나 싶다. “여기 와서 살고 싶으면 당연히 이 나라 말을 제대로 해야지”라는 것이 보통 브라질 사람들의 외국인에 대한 태도다.
한국 동포사회를 잘 아는 브라질 사람들로부터 “너희 한국 사람들은 왜 우리 말을 안 쓰냐?”라는 질책성 코멘트도 가끔 듣게 된다. 그럴 때면 “포르투갈어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나이 들어 외국말 배우기가 그만큼 어려워서 못하는 거다. 좀 봐주라” 하고 변명을 대신 한다.
어른이 되어 외국어 익히기는 현지에 산다고 해도 참 어려운 일이다. 따로 시간을 내어 공부하지 않는 한 아무리 24시간 옆에서 들려오는 말이라도 무의미한 소음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민 와서 처음 1년에 말 못 배우면 영영 못 배운다”는 말도 있다. 모국어만 사용해도 생활이 될 만큼의 조건이 주위에 갖춰지기 때문에 간단한 단어들을 외워서 답답해서 죽을 정도만 벗어난 뒤에는 자연히 말 배울 노력을 않게 되니 제자리에 머물게 된다는 뜻이다.
제한된 몇개의 어휘만 갖고 말을 하려다보니 우스운 일도 많다. 상파울로에 사는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어느 한국 아저씨, 하루는 브라질 이웃과 말다툼이 붙었다. 그 아저씨가 흥분해서 말한 한국식 포르투갈어를 영어 표현으로 옮겨보자면 “You speak, speak, I speak, no speak!”
그 아저씨가 하고자 했던 말은, “네 말만 말이고 내 말은 말이 아니냐!”였다. 내게도 엉뚱하게 단어를 잘못 사용해서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브라질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같이 학교를 다니던 브라질인 친구들과 4명이서 한차에 타고 장거리 여행을 나선 길이었다. 출발하고 5분쯤 지났을 때 내가 운전하던 친구에게 부탁했다.
“잠깐만 차 돌려서 우리집에 좀 들렀다 가자. 성도착(性倒錯)자(트라베스치)를 집에 놓고 왔어.”
잠시 차 안에는 침묵만 흘렀다. 운전하던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돌려 우리집 앞으로 데려다 줬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나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부연 설명까지 해줬다. “나는 성도착자 없으면 잠을 못 자거든.”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내리고 난 뒤 차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쟤가 지금 뭘 가지러 간다는 소리야?” “…나도 몰라.” “여기 한명 더 타면 너무 좁잖아?”
잠시 뒤 내가 들고 온 것은 베개(트라베세이루: 성도착자를 뜻하는 트라베스치와 발음이 유사함)였다. 나는 어디를 가도 내 베개가 있어야 잘 수 있다고 유난을 떠는 사람이 아니다. “장거리 여행에 베개를 가져가면 차 안에서 잠깐씩 눈 붙이기에 좋지 않겠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 문장을 꾸밀 실력이 안 되다보니 그랬던 것이다.
책으로 보는 세계|<안개 속의 여인>
고릴라의 연인 “내 가슴속 깊은 곳에는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미치지 않아 자연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상에 가서 야생동물들을 바라보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열망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난 시간을 거슬러 머나먼 과거로 되돌아가길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은 흔히 현실에서 직면하는 절망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에 갈 열망을 간직하고 있던 다이언 포시가 마침내 이상적인 대상으로 발견한 곳이 르완다의 화산국립공원. 유명한 산고릴라들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미국 태생의 다이언 포시는 화산국립공원에 소재한 카리소케 산고릴라 연구센터에서 산고릴라들의 보호와 연구에 모든 열정을 바치다가 1985년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안개 속의 여인: 다이언 포시와 아프리카 산고릴라들에 관한 이야기>는 다이언 포시가 비극적으로 살해당한 뒤 그가 남긴 일기, 편지, 기고문 등을 모으고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의 일생을 재구성한 책이다. 어린 다이언 포시는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계부의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계부는 결코 그를 친딸로 받아들이지 않아 고독과 우울로 점철된 유년의 기억을 간직해야만 했다. 유일한 위안은 아무런 조건없이 그를 받아들이는 동물들. 열정적이고 지적이었으며 타인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녔으나 유쾌하지 못했던 유년 시절은 그의 성격형성에도 영향을 끼쳐 주변에 수많은 적을 두고 있었다.
르완다에 정착하여 비극적으로 살해당하던 순간까지 19년간 다이언 포시는 산고릴라 연구와 보호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우선 그는 산고릴라들이 영화 <킹콩>에서 묘사된 것처럼 두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공포처럼 다가오는 사나운 동물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평화롭고 유순한 채식성 동물임을 밝혀냈다. 팔짱을 끼거나 나뭇가지 혹은 잎사귀를 따는 행동을 흉내냄으로써 고릴라들에게 친밀하게 어울리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등 고릴라들의 행동양식과 의사소통체계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것도 다이언 포시였다.
산고릴라를 보호하기 위한 다이언 포시의 헌신적 노력으로 산고릴라들은 멸종위기에서 벗어나 현재 그들이 집단서식하고 있는 르완다, 우간다, 콩고민주공화국에는 인간과 가장 유사한 동물을 보려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다이언 포시와 함께 일했던 르완다인들은 그를 “숲 속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여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이 책은 “안개 속의 외로운 여인” 다이언 포시가 어떻게 인간세계에서의 고독과 절망감을 동물보호로 변화시켰는지를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동물보호와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중심적 시각과 편견이 행간에 스며 있어 다소 거슬리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산고릴라의 보호와 연구에 열정적 삶을 바친 한 여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기에는 좋은 길잡이이다.
헨트=양철준 통신원 YANG.chuljoon@wanadoo.fr |
상파울루=오진영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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