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68년 12월 ‘인도네시아-1965 역효과를 낳은 쿠데타’라는 조사보고서를 냈다. 2007년 5월 공개된 보고서는 1965~66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대학살(이하 1965년 대학살)을 ‘20세기 최악의 대학살 가운데 하나’로 규정했다. “인도네시아 반공 대학살은 1930년대 소련의 숙청,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대학살, 1950년대 초 마오주의자 대학살과 함께 희생자 수에서 20세기 최악의 대학살 중 하나다.”
한국전쟁 전후 보도연맹사건 등 수십만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한국에 인도네시아 1965년 대학살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2012)이 국내에 개봉(2014년 11월)되면서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조금씩 알려졌다. 영화는 1965년 대학살 가해자들이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고백하는 과정을 담아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는 베를린국제영화제 2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등 전세계 70여 개 영화제에 초청됐다.
인도네시아에서 ‘1965년 대학살’은 여전히 금기어다. 정부는 자카르타의 극장에서 <액트 오브 킬링> 상영 일주일 만에 상영을 금지했다. 군부는 피해자들의 모임이 발각되면 금지하고 위협한다. 금기를 뚫고 피해자들은 진상 규명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99년 4월 설립된 단체 ‘YPKP65’가 구심이다. YPKP65는 인도네시아어 ‘Yayasan Penelitian Korban Pembunuhan 1965/1966’의 약자로 ‘1965~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희생자 조사를 위한 재단’이라는 뜻이다(영어로는 Indonesian institute for the study of 1965/66 Massacre).
이 단체와 베드조 운퉁(69) 대표가 지난 6월26일 제7회 진실의힘 인권상을 받았다. 진실의힘은 독재정권 시절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이 결성한 재단이다. 인권침해 피해자 지원과 진상 규명을 진행하고 있다. 이 단체는 4월27일 전문성을 인정받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로부터 특별협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진실의힘 인권상은 국가폭력에 맞서 인간 존엄성을 일깨운 개인·단체에 매해 수여된다. 지난 6월27일 서울 종로구 진실의힘 사무실에서 베드조 운퉁 대표를 인터뷰했다. ‘1965년 대학살’ 전후 상황에 대한 설명은 ‘제7회 진실의힘 인권상 결정문’(2017년 6월26일), ‘미국 중앙정보국 조사보고서’(1968년 12월), ‘1965년 인도네시아 반인권 범죄 국제민중재판소 최종 보고서’(2016년 7월20일), <작가의 망명>(안드레 블첵·후마니타스·2011),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2012) 등을 참고했다. _편집자
지난 6월27일 서울 종로구 진실의힘 사무실에서 만난 베드조 운퉁. 정용일 기자
군부·미국 기획이라는 오랜 의혹 당시 공산당엔 수카르노 대통령을 끌어내릴 이유가 없었다. 네덜란드 점령기 독립운동가였던 수카르노는 1950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 노선을 걸었다. 미소 냉전 구도에서 비동맹 중립외교를 표방한 것이다.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를 주최한 데 이어, 1961년 옛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비동맹운동 결성을 이끌었다. 1960년대 베트남전을 통해 반공 전선을 확대하던 미국 처지에서 수카르노는 눈엣가시였다. 당시 합법정당이던 공산당은 수카르노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미 중앙정보국 보고서는 1965년 5월23일 인도네시아 공산당 45주년 기념대회에서 수카르노가 공산당을 극찬하는 연설을 했다고 기록했다. “공산당은 300만 명의 아이들을 가진 300만 명 당원의 정당이 됐다. 공산당은 어떻게 이런 정당이 됐나. 공산당은 계속 진일보하는 혁명적인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산당을 열렬히 응원하며 공산당의 장수를 기원한다. 계속 전진하라. 나의 동지, 나의 형제의 죽음은 곧 나 자신의 죽음이 될 것이니.” 그때 베드조 운퉁은 17살 고등학생이었다. 중부 자바 페말랑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베드조는 교원양성 직업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교사이던 아버지의 뜻이었다. 아버지는 교원노조 열성 활동가이기도 했다. 수하르토 군부는 아버지를 체포했다. 청년 공산주의자 그룹에서 활동하던 삼촌도 체포했다. 농민단체에서 활동한 또 다른 삼촌은 실종됐다.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은 고요했다. 당시 체포된 인도네시아 대문호 프라무댜 아난타 투르는 대담집 <작가의 망명>에서 그때 거리의 풍경을 ‘총체적 침묵’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은 아연실색해서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군부는 어디에서나 사람들을 영장 없이 마구잡이로 체포했죠. 강물은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사람들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었어요.” 반공주의에 고취된 민간인들도 학살에 가담했다. 주인도네시아 미국대사관은 1965년 11월 미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11월13일 경찰정보국장 부디 주워노가 보고하길, 군부를 찬양하는 민간 반공단체들이 매일 밤 동부와 중부 자바에서 공산당원 50~100명을 죽이고 있다”고 썼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서 민간인 학살 집행자 안와르 콩고는 당시 학살 장면을 재연하며 말했다. “처음엔 때려 죽였는데 그러면 피가 많이 나요. 여기에 피가 엄청 고이는데 그걸 치우고 나면 비린내가 말도 못해. 그래서 피가 많이 안 나게 하려고 이런 도구를 썼지. (기둥에 철사를 고정하고 철사로 피학살자 목을 감은 다음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며) 이러면 피가 많이 안나요. 잊기 위해 좋은 음악 듣고 술도 마시고 마리화나도 피우고 엑스터시도 하고.” 8만7천 명? 300만 명? 희생자 수 불명확 ‘1965년 대학살’의 규모는 불명확하다. 50여 년째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몇몇 추정치가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 보고서에선 인도네시아 정권이 밝힌 희생자 규모 8만7천 명은 ‘너무 적다’고 평가하며, ‘미국대사관 추정치는 25만 명이며 최대 5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썼다. 주인도네시아 영국대사관은 1966년 2월23일 스웨덴의 한 영사가 집계한 40만 명 규모에 대해 ‘과소 집계’라고 외무부에 보고했다. 영국 일간지 <더 선>은 1966년 8월5일 인도네시아 군 조사보고서를 입수해 중부·동부 자바에서 80만 명, 발리·수마트라에서 각각 10만 명, 총 100만 명이 희생됐다고 보도했다. 인도네시아 인접국인 오스트레일리아의 학자 로버트 크리브는 1990년 발간한 저서 <1965-6 인도네시아 학살>에서 희생자 규모 추정치의 한계도 지적했다. “군대가 직접 학살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종종 그들은 단지 대규모 학살을 수행하는 민간 반공단체에 무기, 기초훈련, 강력한 동기부여를 제공했다. 대학살은 1966년 3월 대부분 지역에서 중단됐지만, 1969년까지 가끔 곳곳에서 돌발적 학살이 계속됐다.” 대담집 <작가의 망명>에 따르면, 수하르토 군부의 정치·안보 장관을 역임한 수도모는 200만 명, ‘1965년 대학살’ 지휘자 중 하나인 위보워 장군은 자바에서만 300만 명이 학살됐다고 말했다. 베드조는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하지만 30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런 추정치들은 감옥에서 고문·기아·자살로 숨진 희생자를 제외한 피해 규모다. 베드조는 “학살과 비학살의 명확한 기준 같은 건 없다. 다만 가장 많이 죽은 이들은 공산당원이나 공산당원으로 의심받은 교사, 농민, 청년, 노동자였다. 그다음이 좌익 민족주의자, 수카르노를 지지한 종교인, 그리고 중국인과 여성운동가였다”고 말했다. 베드조는 아버지가 연행된 직후, 고향을 떠나 자카르타로 갔다. “그때 대다수 국민은 공산당을 지지 기반으로 삼은 수카르노를 지지했다. 누가 군부에 잡혀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도망쳤고 노인과 아이만 남았다.” 자카르타 정착 5년차이던 베드조는 가까스로 번듯한 일자리를 구했다. 백화점에서 의료장비를 판매하는 일이었다. 1970년 10월24일 토요일 오전 9시, 매장 문을 열자마자 사복을 입은 체포조 2명이 들이닥쳤다. “따라와”라고만 했다. 돈 한 푼 들어 있지 않은 지갑과 손목시계를 뺏겼다. 군대 차량을 타고 어느 사무실로 이송됐다. 한 달 전 체포된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5년 전 베드조가 고등학교에서 서클활동에 참여한 전력을 문제 삼았다. 공산당 하부조직 활동 아니냐고 추궁했다. 학생운동권에서 주요 직책을 맡은 맏형 수카르노(YPKP65 설립자 중 1인)의 행방을 캐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판 없이 9년간 수감생활
2000년 11월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에서 ‘1965년 대학살’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는 모습. 진실의힘 제공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