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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감옥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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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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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의 패러다임 벗어난 스칸디나비아 감옥… 더 이상 ‘격리공간’ 아니다

사진/ 스웨덴의 현대적인 감옥풍경. 옛소련 출신들은 일부러 범죄를 저지른 뒤 스칸디나비아 감옥에 들어가려 한다.(GAMMA)
근대국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전근대 역사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대중적인 격리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전근대 역사에는 없었던 징병제 국민 군대도 이 범주에 속하고, 학교·공장의 기숙사나 감옥·수용소 또한 그렇다. 그러면 군대, 기숙사, 감옥과 같은 격리 공간에서 동원·징용된 대중이 익혀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숙사, 이성 격리 원칙 폐기

물론 일차적으로 철저한 감시를 받으면서 규율생활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시간표에 따라 동시에 같이 기상, 체조, 식사, 노동, 집단적 스포츠 등을 취하는 것은 전근대적 사회에서는 수도원에서만 부분적으로 가능했던 생활 방식이었다). 이와 함께 통상 민초생활에서는 분명치 않았던 권력관계를 철저하게 익히는 것 또한 하나의 목적이다. 졸병과 상사, 기숙생과 사감, 죄수와 간수의 관계는 고향의 부모와 같은, 가정적인 부드러움이 완전히 결여된 철저한 상명하달식의 권력관계다. 마지막으로, 규율·권력과 함께 오는 것은 일상화된 하향식의 폭력이란 것이다.


일제시대 이후 한국의 학교 기숙사, 군대, 감옥에서의 폭력은 다들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사실 1960년대 이전 서구의 격리 공간 역시 상당히 폭력적이었다. 러시아의 경우 지금 군·감옥에서의 폭력은 20세기 초의 수준에 그대로 머물면서 많은 차원에서 악화·고질화됐다. 단체 규율 생활과 권력·폭력에 훈육된 사람이어야 커다란 기계와 같은 산업사회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고, 세계 대전과 같은 대규모의 무의미한 살육에 아주 쉽게 동원될 수 있었다.

남한과 북한의 경우에는 일제 시절과 6·25, 그리고 군 복무·학교의 단체 훈련 경험의 대중화 없이 대대적인 도시화와 공업화, 새마을운동 등의 대중적 동원 캠페인들이 과연 가능했겠는가? 구미의 경우도 많이 다르지 않지만 특히 남한과 북한의 경우엔 ‘현대성’이 막사와 단체 훈련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우리나라는 하나의 큰 수용소”라는 말이 1950년대까지 유명한 속담이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격리’의 경험은 스탈린식 현대화의 가장 중요한 뒷받침이었다. 약 20%의 인구가 감옥·수용소 경험이 있고, 대부분의 남성들이 군대나 학교 기숙사를 거쳐간 러시아에서, 체첸에서의 군대에 의한 ‘근대적 질서 바로 잡기’(대량민족말살)가 인기를 모은 것이 우연일까?

그러나 요즘 스칸디나비아의 격리 공간을 시찰해보면, 이 지역은 이미 탈(脫)현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기숙사, 막사, 감옥의 명칭이 그대로 남아 있긴 하지만, 이를 ‘격리 공간’으로 더이상 부르기 힘들 정도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기숙사의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한방에서 한 학생만 살게 돼 있다. 또한 서로 붙어 있는 두개의 방에서 각각 남학생과 여학생이 살 수 있다는 것은, 한국 학교 기숙사에서 아직까지도 철저하게 지켜지는 이성 격리 원칙이 여기에서는 이미 폐기처분됐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군 막사도 마찬가지로, 개인용 독방 지급은 물론 출퇴근식 복무의 허락도 원칙으로 돼 있다. 개인 공간이 완전히 확보된 스칸디나비아의 ‘격리 기관’에서, 규율과 권력이라는 측면이 최소한으로 축소되고 폭력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기숙사와 막사보다도 더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기술하고자 하는 감옥의 변모다.

사진/ 스웨덴의 한 감옥에 수감된 여성의 모습. 발에 찬 전자감응장치만으로 감시를 대신한다.(GAMMA)

덴마크의 열린 감옥 렌베크

몇년 전 러시아 신문에서는 대단히 괴이한 소식이 있었다. 구소련 출신들이 스칸디나비아 모 국가로 관광 비자로 가서는, 일부러 범죄를 저지른 뒤 경찰이 오기를 열심히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도주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스칸디나비아 감옥에 투옥돼 되도록이면 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긴 형량을 열망하는 만큼 괴이한 범죄도 저지르고, 경범죄나 짧은 형량의 경우에는 출옥하자마자 본국 송환 기한이 다가오기 전에 다시 또 범죄를 저질러 그리운(?) 감옥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감옥이 얼마나 좋았기에, 감방에 대한 ‘귀소본능’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옆에 실려 있는 스칸디나비아 감옥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감옥에 가기 위해서 스칸디나비아로 떠나는 그들의 논리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폭력 행위의 위험이 대단히 큰 특수 범죄인을 제외하면, 스칸디나비아 감옥의 기본 주거 단위는 하나의 큰 거실과 그에 딸려 있는 개인용 독방들이다. 거실에는 텔레비전과 식탁, 냉장고 등이 설치돼 있고, 독방마다 침대, 책상, 책장과 화장실이 있다. 원칙적으로 격리 공간이라기보다 죄수를 위한 집, 즉 개인 사생활 공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교도관 등의 직원도 죄수의 허락 없이는 그 방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일상적인 규칙이다.

노르웨이의 경우 죄수가 저녁 9시까지 복도나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는 휴게실, 공중전화실, 그리고 감옥의 기본 복지 시설은 물론, 헬스클럽과 운동장, 사우나 등을 즐긴다. 왕래할 수 없는 심야시간에는 죄수 방의 문이 보통 잠겨 있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감시는 금지돼 있다. 감옥의 직원들이 폭력과 감시를 일삼는 전통적인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르다 할 수 있다. 간수의 절반 이상이 여성들이고, 대부분이 심리학·법학·사회복지학 전공자들로서 죄수의 사회 적응에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다.

감옥이 격리 공간임을 거론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죄수들이 일주일의 정규적인 몇 시간의 면회시간 외에 일년에 약 18일을 집에 돌아와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 해도 도주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이유는 감옥 여건이 만족스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철저한 개인 등록제 및 경찰제도가 장기간의 은닉생활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칸디나비아 감옥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것으로 꼽히는 것은, 덴마크의 ‘렌베크’와 같은 이른바 ‘열린 감옥’들이다. 거기엔 담도 아예 없다. 감옥이라는 것이 죄수의 직장과 같은 농장을 포함한 작은 마을일 뿐이다. 죄수들은 아내나 애인, 가족과 낮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보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단, 밤에 ‘감방’인 아늑한 농가에서 자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조건이다. 물론 이 조건이 지켜지지 않으면, 죄수는 평범한 ‘닫힌’ 감옥으로 이감(移監)된다.

한국 감옥의 개혁을 기대한다

그 아늑한 감옥의 텔레비전 수상료(受像料)나 전화비, 세탁비 등의 잡비는 자비로 충당해야 되는 관계로, 일을 하는 것은 (형식적으로 자유 선택이지만) 거의 의무시된다. 그러나 하루 6시간 간수도 없는 농장에서 쉬어가면서 일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감옥 노동’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죄수에게 주는 월급의 일부분은 그의 개인 통장에 자동이체돼 출옥 뒤의 정상생활의 밑천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죄수가 학교나 대학 과정을 밟을 의사를 밝히면, 그의 노동시간은 자동적으로 단축되거나 취소된다. 월급 대신에 이제는 장학금을 받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는 수업 출석 없는 자습과 시험 통과만으로 학위 수여가 가능하기에, 학위를 따낸 죄수의 모습을 보기가 그리 힘들지 않다. 출옥 이후 죄수의 사회 적응을 걱정하는 감옥 직원들은 죄수의 향학열을 격려해준다. 결론적으로 ‘감시와 처벌’의 패러다임을 이미 벗어난 스칸디나비아 감옥의 주요 목표는, 사회생활의 적응력 부족으로 반(反)사회적 행위를 저지른 사람의 적응 능력을 길러, 사회인으로서 회복·발전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격리 공간에서의 규율·권력·폭력에 의한 훈육을 밑바탕으로 삼았던 현대를 탈피하는 것은 산업화된 지역들의 주된 추세다. 미래에는 처벌과 규율·복종 익히기의 장이었던 종래의 감옥들도 크게 혁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감옥의 개혁 과정에서는, 죄수들에 대한 상업적인 착취를 위주로 하는 미국식 감옥 개혁의 방식보다 죄수의 전인적인 발달과 사회 복귀를 목적으로 하는 더 인간적인 스칸디나비아 방식을 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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