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이 작전을 수행한 지역인 베트남 퐁니·퐁넛 마을에서 1968년 2월12일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한겨레
정의롭지 못한 전쟁 베트남전쟁이 20세기 후반에 발생한 가장 ‘부정의한 전쟁’이었다는 점에는 세계사적 합의가 존재한다. 전쟁이 끝난 뒤 많은 연구와 논의를 통해 비로소 ‘부정의했다’고 평가된 것이 아니다.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던 영국과 프랑스조차 참전을 거부했을 만큼 베트남전쟁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은 당대에도 명확했다. 그 전쟁에 대한민국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연인원 32만5천여 명을 파병했다. 이는 미국 다음가는 규모였다. 파병은 가장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지하는 방식이다. 명분 없는 전쟁에 태극기를 단 군인들을 떠밀면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내세운 것이 경제 발전이었다. 반공주의 명분(북베트남 주도로 베트남이 통일되면 아시아에 공산주의가 도미노처럼 확산된다)은 파병 초기인 1967년까지만 이야기됐을 뿐이다. 이후부터는 파병의 성과와 이익이 강조됐다. 이 경제논리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지배적 인식으로 굳어진다. 역사 교과서에 기재된 베트남전쟁 서술에 언제나 전쟁 특수가 언급되는 이유다. 그 논리가 2017년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에서까지 반복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부정의한 전쟁’에 가장 앞장섰다는 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전쟁을 주도한 미국조차 베트남전쟁을 가장 참담한 외교 실패로 되새김질하고 있음에도, 유독 한국만 애써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논리로 포장한다. 결국 돈 벌려고 자국 군인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는 사지로 보냈고, 5천 명의 전사자와 1만2천여 명의 고엽제 희생자를 만든 국가였다는 자인일 뿐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참전은 애국이었다’고 강변한다. 무엇보다 그 많은 한국군이 베트남전쟁 때 행한 민간인 학살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베트남 중부 한국군 주둔지 지역에는 수많은 ‘한국군 증오비’ ‘학살위령비’가 있다. 위령비에 적힌 이름은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이다. 1999년 이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실과 피해자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전해졌고, 주월 미군의 감찰 보고서 등 신빙성 높은 자료까지 확인됐지만, 한국 국방부의 공식 입장은 “민간인 학살은 존재하지 않았다”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외침에 군에 의한 강제 연행은 없었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본과 한국은 얼마나 다른가. 베트남에 한국만큼의 시민사회가 있었다면,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앞에 또 다른 ‘소녀상’이 설치됐을지도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모사에서 “이국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생긴 병과 후유 장애는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채”라며 “이제 국가가 제대로 응답할 차례다. 합당하게 보답하고 예우하겠다”고 말했다. 마땅한 이야기다. 베트남전쟁 파병을 부끄러운 역사로 직시하는 것과, 그 과정에서 강제 동원된 이들에게 국가가 보상과 예우를 하는 것은 병존될 수 있다. 베트남전쟁에 고개 숙이는 미국이지만, 미국 제대군인부(보훈처)의 최대 보훈 대상은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들이다. 일본과 달라야 하지 않겠나 문 대통령은 “이제 국가가 응답할 차례”라고 말했다. 그 대상이 참전 군인으로 한정돼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베트남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응답해야 할 또 다른 대상은 한국 군인들이 저지른 수많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다. 이미 20년 가까이 이 문제가 공론화되고 수많은 증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어떤 진상 조사도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일본과 달라야 하지 않겠나. 가해국으로서 먼저 진상 조사와 책임 있는 후속 조치를 제안할 때, 한국 사회는 비로소 베트남전쟁에 대한 후안무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임재성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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