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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테일러는 프린터 회사 제록스에 팰로앨토연구소(PARC)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실리콘밸리의 시작이자 전설이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레이저프린터와 개인컴퓨터 ‘알토’가 생겨났고, 근거리통신망 기술 ‘이더넷’이 처음 구현됐다. 컴퓨터 화면에 ‘데스크톱’을 만들고 아이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보여주는 그래픽 디스플레이도 이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다. 이는 애플과 매킨토시,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제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 영감을 주었다. 테일러는 애초 심리학자였다. 공학 관련 박사 학위도 없고 인터넷 네트워크나 컴퓨터 실무 기술 지식도 당연히 부족했다. 그가 연구실에서 다뤄야 할 이들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나 버클리대학 등 이른바 명문대를 나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고집 세고 우수한 젊은 과학자였다. 테일러에게는 그들이 협업하고 목표를 공유해 그에 걸맞은 결과를 내도록 이끄는 능력이 있었다. ‘알토’팀의 앨런 케이는 [LA타임스] 인터뷰에서 “테일러는 모두가 프로젝트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테일러 후임 연구소장으로 재직한 빌 스펜서는 이렇게 회상했다. “테일러는 출근하면 사무실에 있지 않고 나와서 8~10시간 동안 모든 연구원들을 개인적으로 만났다.” 조직원들의 가능성을 최대한 고양시키는 것이 테일러의 관리 방식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딜러의 방’이라 불린 아이디어 모임을 열었다. 한 주의 주제를 제시한 연구자를 둘러싸고 동료들이 편안한 의자에 기대어 난상 토론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테일러는 누군가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면 “물론,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해”라고 말하는 상사였다. 테일러는 연구원들이 해야 할 일을 세세하게 적은 구상도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연구가 빠르게 진척되게 하는 촉매 같은 존재였다. ‘알토’팀 버틀러 램슨은 [LA타임스] 인터뷰에서 “‘마스터’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테일러는 언제나 향후 몇 년을 계획해두었고, 우리는 그대로 따라 걸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83년 테일러가 팰로앨토연구소를 떠나 디지털이큅먼트사(DEC)로 옮겨갈 때 연구원 15명이 그를 따라갔다. 다른 이들은 애플이나 아타리(비디오게임 회사), 마이크로소프트로 흩어졌다. 1996년 은퇴할 때까지 테일러는 이 연구소에서 초창기 인터넷 검색엔진 ‘알타비스타’ 만드는 일을 도왔다. “40년 동안 누구와 일할지 선택할 수 있었다” 은퇴 이후 테일러는 실리콘밸리와 스탠퍼드대학 캠퍼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자택에서 살았다. 그는 토마토를 기르면서 개 두 마리와 함께 지냈다. 종종 컴퓨터게임을 했지만 휴대전화는 없었다고 한다. 테일러는 생전에 그가 착안한 발견에 특허를 낸 적이 없고 특별히 돈을 많이 벌지도 못했다. 1999년 미국 정부가 주는 최고 기술훈장인 국가기술혁신메달을 받았지만 “가능하면 실리콘밸리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며 시상식에 다른 사람을 보냈다. 테일러는 2000년 실리콘밸리 지역신문 <새너제이 머큐리 뉴스>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40년 동안 누구와 가까이 일할지 선택할 수 있었다. 나 말고 누가 그럴 수 있었겠나. 그게 내 인생이었다. 고의적으로 상업적인 세계와 거리를 둬왔다. 당신들이 성공적인 회사를 만들기 위해 같이 일해야만 하는 머저리들과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킨슨병을 앓던 테일러는 지난 4월13일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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