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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 가까워지면서 옙투셴코는 출판과 해외 낭송회를 허가받았다. 유럽, 미국, 쿠바,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그의 시가 널리 읽혔다. ‘바비야르’로 정점을 찍었던 1962년 <타임>은 ‘화난 젊은이’ 옙투셴코를 표지에 실었다. 그는 러시아를 변화시키고 자유화하는 젊은 주역으로 소개됐다. 유명 인사가 된 옙투셴코는 서구나라들로부터 끊임없이 초대받았다. 웅변하듯 시를 읽는 옙투셴코의 낭송회에 서구의 청중도 열광했다. 옙투셴코는 소련 밖으로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어디든 가려고 애썼다. 영국 런던에서 시인 T. S. 엘리엇, 미국 정치인 로버트 케네디를 만나는 등 유명 인사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단지 명성에 집착해서가 아니라 소련 밖에서 현대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을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1972년 미국에 몇 주 동안 머무르면서 전국 시 낭송회에 참석했다. 그 무렵 옙투셴코는 이미 국제적인 우상이었다. 그는 환호와 대우를 당연시 여기며 즐기는 사람이었다. 옙투셴코는 노골적인 반체제 인사 명단에 오르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그는 언제나 정부의 공식 승인에 따라 행동했기에 대담한 반체제 인사들은 이를 비난했다. 사람들이 추방당하거나 감옥에 가는 동안 옙투셴코는 상을 받았고 계속 책을 냈으며 해외여행을 허가받았고 세계적 시인이 됐다. 사람들은 옙투셴코가 폭압적인 소련 체제에 저항하는 것이 맞느냐며 의심했고 ‘변절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련에서 추방당한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옙투셴코를 두고 “그는 정부가 허가하고 용인한 방향을 향해서만 돌을 던진다”고 했다. 누구도 옙투셴코가 소련 정부와 타협을 했다는 증거를 찾진 못했다. 생전에 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 대우를 받았던 옙투셴코는 모욕과 질투, 감시와 늘 함께했다. 옙투셴코가 투철한 투사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스탈린의 유산과 소련의 전체주의에 반대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닥터 지바고>의 작가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반대하는 정부 캠페인에 참여하길 거절했다. 1968년에는 소련의 체코 침공에 반대하는 탄원 활동을 벌였고, 1979년엔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도 반대했다. 사랑과 자연 노래한 작품 많아 옙투셴코는 1933년 시베리아 횡단철도 주변 외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양가 할아버지들은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해 처형당했다. 부모는 둘 다 지질학자였고, 어머니는 나중에 가수가 됐다. 아버지는 지질학 조사를 떠날 때 종종 아들을 카자흐스탄과 알타이산맥의 야생 속으로 데려갔다. 옙투셴코는 그 길에서 자연과 문학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부모가 이혼한 뒤 어머니를 따라 모스크바에서 지내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진격하자 1941년 다시 고향으로 피란을 떠났다. 옙투셴코의 시는 16살 때부터 신문과 유명한 잡지에 실렸다. 소련 정부도 옙투셴코의 재능을 인정했다. 프로축구팀 입단 제의를 받을 만큼 운동에도 뛰어났지만 그는 고르키 문학 학교에 입학했다. 옙투셴코는 평생 수천 편의 시를 남겼다. 저항시만이 아니라 사랑과 자연을 노래한 작품도 많다.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러나 옙투셴코의 시선 중 일부가 러시아 문학사의 통찰과 양심을 보여주는 명작이란 데는 이견이 없다. 1990년대 소련이 무너지고 옙투셴코는 국회의원이 돼 러시아를 재건하는 데 나섰다. 친선 대사로서 외국에도 자주 나갔다. 말년에 옙투셴코는 오클라호마 털사대학 등 주로 미국에서 강의를 하며 지냈다.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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