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에티엔 치세케디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연합뉴스
당뇨로 건강이 좋지 않던 치세케디는 벨기에에서 2년간 치료받다가 지난해 7월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로 돌아와 머물렀다. 그가 귀국한 날 거리에는 ‘영웅의 귀환’을 축하하러 수십만 명이 모였다. 브뤼셀에 건강검진차 방문했던 치세케디가 숨졌다는 소식이 킨샤사에 퍼지자 그의 자택 부근에선 지지자들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일부가 체포되기도 했다. 치세케디를 애도하는 시민들은 영국 방송 BBC 인터뷰에서 “그는 인생 전부를 희생해서 우리를 눈뜨게 해줬다” “만델라를 잇는 역사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치세케디의 장례는 콩고민주공화국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선출된 대통령’이라 불린 낙선자 독재정권하에서 민주주의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치세케디의 이력은 단순하지 않다. 법을 공부한 치세케디는 1960년 콩고민주공화국이 벨기에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한 직후 정부 사법위원회에서 일을 시작했다. 1965년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모부투가 30년 넘게 집권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친 입안자 중 한 사람이 치세케디였다. 어느 날은 내무장관이었다가 그 다음날에는 집에 연금되고 군인에게 구타를 당하는 게 치세케디의 정치 인생이었다. 모부투는 치세케디를 모로코 대사로 임명했다가 이후에는 고문했다. 1982년 치세케디는 콩고민주공화국 역사상 첫 야당 민주사회진보연합(UDPS)을 창당했다. 1990년대 냉전이 끝나고 세계적인 민주화의 흐름과 서방의 압력에 골머리를 앓던 모부투 대통령이 치세케디를 네 번이나 총리로 지명했지만, 매번 둘이 충돌하는 탓에 몇 달 가지 못했다. <뉴욕타임스>는 “치세케디와 모부투는 서로를 경멸했다. 머리가 두 개인 그들의 정부는 지독한 불신 때문에 거의 무력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치세케디는 욱하는 성격과 비타협적 태도를 평생 꺾지 않았다. BBC는 “반세기 넘게 콩고민주공화국은 모부투, 카빌라 부자 대통령 같은 독재자들에 맞서 치세케디의 뒤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 그러나 때때로 그의 고집스러운 태도가 민주적 진보를 가로막기도 했다”고 밝혔다. 모부투가 로랑 카빌라 전 대통령의 손에 1997년 축출된 뒤에도 치세케디는 야권에 남았다. 결국 고향 마을로 추방당해 정치적 유배기를 겪어야 했다. 카빌라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가 집권하기 직전인 2000년에는 해외로 망명을 떠났고, 2003년 다시 콩고민주공화국에 돌아왔지만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미래는 어디로 2011년 치세케디는 조제프 카빌라에 맞서 대선에 출마해 패했지만 “선출된 대통령”으로 불렸다. 카빌라 정권하에서 치러진 선거에는 부정이 횡행했다는 게 국내외 목격자들의 논평이었다. 당시 치세케디와 지지자들은 카빌라 대통령의 취임식을 저지하고 자체 취임식을 강행해 경찰에 7명이 사살되고 542명이 체포됐다. 1960년 벨기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뒤 60년 가까이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민주적으로 정권 교체가 된 적이 없다. 쿠데타, 암살, 부정선거 의혹, 불법적 집권 연장 시도의 연속이었다. 2006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처음 민주적 절차에 따른 선거가 시행됐지만 매번 현직 대통령 카빌라가 당선돼 16년을 집권했다. 이를 견제해온 치세케디가 죽고 그를 대체할 만한 야권 지도자가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 콩고민주공화국의 미래는 불안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미국의 변화 또한 상황을 악화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논평에서 “지난해 버락 오바마 정부는 카빌라 정부가 선거를 치르고 헌법을 존중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 어떤 면에서 보나 지금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민주주의의 진전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 지금으로서 카빌라는 기꺼이 콩고민주공화국의 미래를 갖고 놀 것처럼 보인다. 무엇도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밝혔다.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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