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블루는 1930년 런던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양복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중 9살 블루는 가족과 함께 영국 전역으로 16차례 피란을 다녀야 했다. “내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친구도 전혀 없었고요.” 전쟁 중 어디서건 공공도서관이 은신처였던 덕에 블루는 나중에 학교에서 항상 1등 하는 소년이 돼 있었다.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과 성정체성 때문에 블루의 종교적 여정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블루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무신론자였다가, 유대교와 화해하기 전에는 기독교 사제가 되기 고려했다. 블루가 종교인이 된 것은 결국 성정체성이 계기가 됐다. 블루 자신이 게이임을 깨달은 건 14살 때다. 이후 그는 옥스퍼드대학에서 만난 여자친구 조앤나 휴스와 사랑에 빠졌지만 육체적 사랑을 나눌 수 없어 심란해했다. 블루는 성정체성 때문에 신경쇠약에 시달려 자살까지 시도했다. “옥스퍼드에서 ‘연민’은 배우지 못했다” 1951년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우연히 옥스퍼드의 퀘이커교도들을 위한 모임에 참여했다. 여전히 무신론자이던 블루는 기도 모임에서 자신이 믿지 않는 신을 향해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며 얼떨떨했지만, 그들의 단순함을 보면서 신앙이 독실했던 러시아인 할머니를 떠올렸다. 또 한 사람이 “네 성공은 널 영리하게 만들지만, 널 지혜롭게 만드는 건 네 문제들뿐이다”라고 말했을 때, 블루는 예상치 못하게 엉엉 울어버렸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 전능하신 자의 자비를 빌면서. “옥스퍼드에서 나는 많은 걸 배웠지만 연민은 배우지 못했다” “내가 가진 문제들이 나의 영적 자본이며 내게 친절함을 가르쳐주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블루는 당시를 회상했다. 블루는 역사학 학위를 딴 뒤 성공회 사제가 되려고 결심했는데, 어머니는 그러면 자살하겠다고 아들을 협박했다. 이후 블루가 랍비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는 동의했다. “내 평생 동안 너를 게토(유대인 격리 거주 지구)에서 꺼내려 애썼고 네가 옥스퍼드에 갔는데 이제 다시 그 안으로 뛰어들겠다니.” 1960년 랍비가 된 블루는 진보 유대교에 헌신했다. 1963년 진보 유대교 세계 연합의 유럽 책임자가 됐고, 런던의 랍비 학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젊은 랍비로서 블루는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을 “전능하신 신의 농담”이라 말하곤 했다. 블루는 1960년대 후반 성체성에 대해 친구들에게 털어놓았고, 1980년대에 랍비로서 처음 커밍아웃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성정체성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군분투했지만, 그럼에도 성소수자 유대인 세계 연합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몇몇 애인과 긴 관계를 가졌다. 말년에 블루는 상담치료를 통해 남아 있던 죄책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다양한 종교인과의 만남 즐긴 ‘개혁파’ 랍비 블루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패와 약점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고 남은 하루를 어떻게 살아낼지 보여주었다. 50대에 처음 암 선고를 받고 70대에 들어 심장마비와 간질성 발작을 여러 차례 겪었으며 암수술을 또 받아야 했다. 투병 중에도 에든버러 프린스 축제에서 원맨쇼를 하거나 방송에서 병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했다. 블루 덕분에 영국인들에게 랍비와 유대교는 좀더 인간적인 것으로, 종교적 믿음은 엄숙한 게 아니라 친근한 것이 됐다. 블루는 기독교, 무슬림 등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 좋아했고 힌두교 철학에도 큰 관심이 있었다. 정기적으로 로마 가톨릭 수도원을 방문했고, 로마 가톨릭 신문에 글을 썼다. 이렇게 다른 종교 사이 벽을 넘어다닌 덕에, 다음 캔터베리 대주교로 유대교 랍비 블루가 최선의 선택일 거라는 농담까지 나왔다. 막상 유대인 단체들로부터는 불신의 눈초리를 받은 블루는 자신을 ‘개혁파 랍비’라고 불렀다. 랍비 로라 재너클라우스너는 이렇게 말했다. “랍비 라이어널은 스승이었고 작가였고 큰 사랑을 받은 방송인으로서 영국인들이 유대인과 유대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바꿨다. 가장 중요한 건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김여란 객원기자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