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 연합뉴스
“다다미 한 장보다 작은 공간” 다베이는 옆으로 누운 자세로 조심스럽게 기어 그곳을 지나야 했다. 그렇게 기어 엎드린 채로 정상에 다다랐다. 낮 12시30분. 그곳은 평평한 직사각형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후 인터뷰에서 자신이 경험한 에베레스트 정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다다미 한 장보다 작은 공간.” 다베이는 일본기를 펴고 그곳에 50분 동안 머무른 뒤 하산했다. 남녀 통틀어 그 좁은 공간에 다다른 36번째 인물이었고, 여성으로서는 처음이었다. 다베이 이후 많은 여성이 그 뒤를 따랐다. 40여 년간 4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중에는 그녀가 에베레스트를 떠나고 불과 11일이 지난 뒤 정상에 오른 티베트의 판톡, 2014년 13살의 나이로 최연소 여성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인도의 말라바스 푸르나도 있다. 다베이는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에도 세계 60여 개국의 최고봉에 올랐고, 1992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7대륙 최고봉’을 완등했다. 다베이가 유명 인사가 된 뒤, 언론은 언제나 그녀의 작은 체구와 ‘엄마’로서 받은 사회적 억압을 강조하기 좋아했다. 실제 그녀는 150m 키에 40kg 남짓 몸무게를 가진 작은 여성이었다. 동시에 에베레스트 등정 당시 35살로, 3살 딸이 있는 엄마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베이가 등산을 좋아한 것은 여성에게 덧씌워진 사회적 굴레를 벗기 위해서도, 작은 체구로도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산에 오르는 행위에서 가장 그녀를 매혹한 요소는 “경쟁적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등반할 때는 ‘나 좀 천천히 가야 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를 필요로 한다.”(<텔레그래프>) 스폰서 경계하는 등반가 이시바시 준코는 일본 혼슈섬 후쿠시마현 미하루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다. 10살 때 학교 야외활동으로 닛코국립공원 나스산에 오른 것이 첫 산행이었다. 그녀는 당시 직접 본 산이 “꽃 피고 숲이 우거진 일반적인 산이 아니라 화산토로 이뤄진 시커먼 산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2014년 <제주의 소리>)고 말했다. 이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 가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고, 무엇보다 등산의 비경쟁적인 면에 끌렸다. 그녀는 도쿄 쇼와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62년 졸업 뒤 다양한 등산클럽에 참여했다. 주로 남성들뿐이었다. 1965년 다니가와산을 등산하던 중 동료 등반가인 남편 다베이 마사노부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남편 마사노부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제한적이던 때 대신 자식을 돌보며 그녀의 등반 열정을 지지했다. 1969년 다베이는 남성 중심적인 산악계에서 오직 여성 멤버만으로 이뤄진 ‘여성등반클럽’을 만들었다. 모토는 “여자들 스스로 해외 원정을”. 그러나 실행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특히 매번 여성에 대한 편견을 마주하며 후원자금을 모으는 일은 이들을 절망하게 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여자는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여전히 남자가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일하는 여성들도 차 심부름을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2012년 <재팬타임스>) 자금 마련이 어려웠던 다베이는 당시 일본물리학회 학회지의 편집자로 일했는데, 추가로 피아노 레슨과 영어 과외까지 해 돈벌기에 박차를 가했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요미우리신문>과 일본 방송의 지원을 받아 원정길에 오를 수 있었다. 다베이는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일본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주목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특히 후원사들의 접근을 경계했는데, 자신의 열정이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이 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 등정 도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 산사태 이후, 다베이는 원정을 이어가기 원했으나 후원사의 일원으로 그들과 동행한 남성 기자들이 계속 돌아가자고 주장해 애를 먹었다. 다베이는 1991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자들과 함께 등반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나는 말해야만 한다. ‘내가 리더다. 그리고 내가 결정한다. 당신이 후원자라고 해도.’ 나는 등반에 집중하고 싶은데 다른 문제들을 걱정해야만 했다. 이후, 나는 후원자를 두지 않는다. 훨씬 행복하다.” 말년에 다베이는 환경운동가로서의 행보를 보였다. 특히 매년 수많은 산악인의 방문으로 몸살을 앓는 에베레스트의 환경 악화를 우려했다. 2000년에는 산에서 인간이 배출하는 쓰레기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수량화하는 연구로 규슈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AP'에 따르면 그녀는 2003년 네팔에서 열린 에드먼드 힐러리 등정 50주년 퍼레이드 행사에서 “에베레스트에는 너무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 에베레스트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위암 판정 뒤에도 등반은 계속 다베이는 4년 전 위암 판정을 받은 뒤에도 70대의 나이로 일본과 세계 각국의 산에 오르는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1992년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한 데 이어, 세계 190여 나라의 가장 높은 산에 오른다는 계획을 세웠고, 60여 개국에서 목표를 달성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룩셈부르크, 벨기에, 니제르 등의 최고봉을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한라산, 월출산, 북한산에도 올랐다. 마지막 등반은 지난 7월 후쿠시마 지역 고등학생들과 함께한 후지산(3776m) 등반이었다. 후쿠시마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했다. 다베이는 2012년부터 매해 여름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 젊은이들과 함께 ‘후지산에 오릅시다’ 프로젝트를 해왔다. 우울과 허무에 빠진 이들에게 산속을 걷는 경험은 일종의 치유가 되었다. 7월 인생 최후의 등반에서, 몸이 쇠약해진 그녀는 3010m 지점까지 올랐다. 대신 정상으로 향하는 학생들을 격려했다. “힘들어도 한 걸음씩 오르다보면, 일본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닿을 수 있어.”(<뉴욕타임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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