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연합뉴스
하르마츠는 은퇴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1998년 그는 영국 BBC <에브리맨>이라는 프로그램에 얼굴을 가린 채 가명으로 1분 남짓 출연했고, 이후 영국 <옵서버>와 긴 인터뷰를 나누었으며, 그해 5월 나캄 시절 회고록인 <프롬 더 윙스>를 출간했다. 하르마츠는 1998년 <옵서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600만 명의 독일인을 죽이는 것이었다. 독일인에게 도살된 모든 유대인에게 일대일로 대응하는 숫자여야만 했다.” 1946년 사건 당시로 돌아가보자. 나캄을 창설한 이 조직의 리더는 압바 코브너(Abba Kovner)였다. 그는 후일 이스라엘의 저명한 시인이 된 인물이다. 그는 하르마츠를 “특수작전”의 대장으로 임명했다. 하르마츠는 뉘른베르크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에서 나치 피고인들을 저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을 도와줄 유대계 미국인 간수가 나타나지 않아 불발됐다. 이들은 이제 개별 나치 전범을 살해하는 작전에서 나아가, 일련의 대담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애초 계획은 독일 뉘른베르크시에 공급되는 수돗물에 독극물을 타려는 것이었다. 이들은 뉘른베르크 정수장 내부에 멤버 중 한 명을 위장 취업시키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코브너가 이스라엘 건국을 준비 중이던 유대인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독극물을 가져오던 길, 배에서 영국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영국 경찰은 나캄의 계획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르마츠를 비롯한 조직원들은 윗세대 시온주의자들이 그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곧 이뤄질 꿈인 이스라엘 건국을 앞두고 도덕적으로 발목 잡혀 국제적 지지를 잃게 될 것을 우려했다. 독극물은 바다에 버려졌고, 코브너는 체포돼 이집트 감옥에 수감됐다. 호밀빵 3천 개에 독을 바르다 하르마츠는 코브너의 자리를 이어받아 즉시 ‘플랜 B’에 착수했다. 목표 장소는 뉘른베르크 외곽의 13포로수용소. 나치 친위대 출신 독일인 포로들이 구금된 곳이었다. 계획은 이들에게 공급되는 빵에 치명적 독성 물질인 비소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빵은 수용소 근처 단일 베이커리에서 공급됐다. 이들은 조직원 중 하나를 역시 그곳에 위장 취업시킨 뒤 적당한 시기를 보았다. 1946년 4월 어느 토요일 밤, 하르마츠와 동지들은 베이커리에 잠입했다. 그리고 미리 마룻장 밑에 빼돌려둔 보급품을 꺼내 미술가용 붓으로 호밀빵 3천 개의 표면에 접착제와 섞은 비소를 발랐다. 빵 안에 주입하면 조리 과정에서 독성 물질이 변질될 수 있었다. 이들은 빵 한 덩이를 포로 4명이 나눠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예상 사망자 수는 1만2천 명에 이를 것이었다. 하르마츠는 1998년 <옵서버>와의 인터뷰에서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날 아침, 나는 (수용소에서 죽은) 내 가족들을 생각했다. 그 일이 성공할 것을 생각하면 정말 기분이 좋았다.” 계획은 불발에 그쳤다. 포로들이 고통을 호소했다는 보도는 나왔으나, 사망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 공개된 미국 CIC(전투정보지휘소)의 자료에 따르면 당시 사용된 비소는 6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럼에도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은 것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들이 애초 비소를 너무 얇게 펴발랐거나, 포로들이 빵에서 뭔가 이상한 맛을 감지하고 할당된 양을 다 먹지 않은 것으로 추측됐다. 하르마츠와 동료들은 일을 끝낸 뒤 즉시 해외로 도망쳤다. 하르마츠는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서 이탈리아를 거쳐 다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98년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독일 정부는 살인미수 혐의로 하르마츠와 동료들에 대한 수사를 벌였으나, 그들을 기소하지는 않았다. “특수 상황”이었다는 이유였다. 요제프 하르마츠는 1925년 1월23일 리투아니아 로키스키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청소년 공산주의자 단체에 소속된 드문 ‘유대인 좌파’였으며, 소련의 리투아니아 합병 이후인 1940년 15살의 나이로 유대인 레지스탕스 단체에 들어갔다. 이듬해 나치 점령군이 수도 빌나(현 빌뉴스)에 도착해 가족은 모두 게토에 수용됐고, ‘게토 청소’가 이뤄지는 동안 하르마츠는 다른 레지스탕스 동료들과 하수관을 통해 게토를 탈출했다. “하수관은 비좁고 끔찍했다. 나는 자살을 생각했는데, 만일 내가 죽어버리면 뒤에 오는 사람들의 길을 막아버릴 거라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옵서버>, 1998) 죽기 직전까지 “양심의 가책 느끼지 않는다” 하르마츠는 하수관에서 외곽의 숲으로 도망쳐 유대인 레지스탕스 그룹에 합류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게토에서 자살했고, 형은 소련군에 입대한 뒤 세상을 떠났으며, 동생은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가족 중엔 어머니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나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그때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고 말했다. 지난 8월 그는 'AP'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치열했던 이유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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