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치 데이비스가 ‘재탄생 의식’을 앞두고 침대에 누워 웃고 있다. AP 연합뉴스
1997년 제도 도입 이후 지금까지 오리건주에서 존엄사를 선택한 사람은 모두 752명에 이른다. 오리건주에서 한 해 숨지는 이들 가운데 0.2%에 해당하는 수치다. 의학전문지 <뉴잉글랜드저널오브매디슨>은 2000년 2월24일 오리건 주정부 자료를 따 “존엄사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 신청자 6명 가운데 1명 정도만 존엄사에 필요한 의료진의 처방을 받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처방받은 환자가 모두 존엄사를 실행에 옮기는 것도 아니다. 처방받은 3명 중 1명은 약물을 손에 넣고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오리건주에서 그간 존엄사 처방을 받은 이들은 모두 1173명에 이른단다. “제 앞에선 절대 울지 말아주세요” 팬테라가 답신을 보내고 얼마 뒤 데이비스가 다시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제목란에는 ‘파티’라고 적혀 있었다. 'AP통신'은 지난 8월12일 편지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저의 ‘재탄생’ 기념 파티에 참가하기로 한 모든 분들께,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저를 환송해주기 위해 기꺼이 모이겠다고 밝혀주신 여러분 모두 정말 용기 있는 분들입니다. 규칙은 따로 없습니다.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오세요. 여러분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세요. 춤추고, 폴짝폴짝 뛰고,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함께 기도합시다. 하지만 제 앞에선 절대 울지 말아주세요. 그 규칙 하나면 됩니다. 이번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자리가 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정말 울음을 참지 못하겠거든, 따로 마련해둘 지정석을 이용해주세요. 아니면, 그냥 잠시 한쪽 구석으로 가시든지요. 저는 울어도 됩니다. 루게릭병의 증상 가운데 하나가 웃음과 울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운다면 여러분 때문에 우는 게 아닙니다. 제 신경세포가 망가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가 웃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여러분 때문일 겁니다.” ‘파티 초대장’은 결혼식 일정표 같았다. 1박2일의 마지막 여정을 위한 계획이 빼곡했다. 지난 7월23일 가족과 친구 30여 명이 캘리포니아주 남부 산악 휴양지 오하이에 자리한 데이비스의 집으로 모였다. 한 친구는 화려하게 장식한 풍선을 한 아름 들고 왔다. 풍선에는 “재탄생을 축하해”라고 적혀 있었다. 첼로를 들고 온 친구도 있었다. 다른 친구는 하모니카를 준비했다. 부둥켜안고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었다. 영화를 찍는 친구가 모든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했다. 7월24일 오후 4시께 전채로 멕시코식 타말레를 먹기 시작했다. 데이비스의 단골 가게에서 주문한 피자가 도착했다. 오후 5시부터는 칵테일 파티였다. 데이비스가 좋아하는 영국 팝과 인디 록을 들었다. ‘뉴오더’와 ‘픽시스’의 음악에 맞춰 흥을 돋웠다. 이어 데이비스가 제일 좋아하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단편영화 <현실의 꿈>을 함께 봤다. 데이비스는 미리 아끼는 물건을 모두 꺼내놓았다. “이 물건들을 통해 너희들 곁에 머물고 싶어.” 친구들은 쇼핑을 하듯 물건을 골랐다. 가끔씩 자리를 비운 친구들도 있었다. 잠시 뒤 돌아온 이들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윽고 자동차 한 대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테슬라의 최신 전기자동차 ‘모델 엑스’다. 독수리 날개처럼 열리는 문을 보며, 데이비스가 활짝 웃었다. 도우미가 그를 안아 차에 앉히는 동안 친구들은 환호성을 울리며 박수를 쳤다. 집 앞 저만치 떨어진 언덕에는 흰색 천막이 쳐져 있었다. 간이침대도 준비돼 있었다. 함께 언덕에 오른 이들이 석양을 바라봤다. 이제 ‘의식’을 치를 차례다. 데이비스가 2014년 일본 여행길에 사온 흰색과 파란색 줄무늬로 된 기모노를 입었다.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는 친구가 매무새를 가다듬어줬다.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기 위해 친구들은 천막 밖으로 나갔다. 팬테라는 데이비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너 오늘 정말 예뻐. 이따가 봐.” 사인, 자살 아닌 루게릭병 6시45분이었다. 도우미가 모르핀과 수면제 등으로 이뤄진 처방약을 내왔다. 그의 동생 켈리 데이비스는 8월9일 <보이스오브샌디에이고>에 기고한 글에서 “약을 편하게 먹게 해주려고, 코코넛우유에 설탕과 소금을 살짝 섞어줬다”고 썼다. 15분쯤 지났을까? 데이비스는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심장은 여전히 박동을 멈추지 않았다. 의사는 데이비스의 심장이 언제쯤 멈출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몸은 다시 집 안으로 옮겨졌다. 친구들은 그의 손과 발에 유향과 아로마 오일을 발라줬다. 집 밖으로 나온 친구들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밤 10시35분 데이비스의 심장이 멈췄다. 향년 41. <워싱턴포스트>는 8월16일치에서 “캘리포니아주 개정 의료안전법에 따라, 데이비스의 사인은 ‘자살’이 아니라 ‘루게릭병’으로 기록됐다”고 전했다.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던 친구들은 내년 6월 데이비스의 마흔두 번째 생일에 다시 모여, 그의 유해를 함께 뿌려주기로 했단다. 정인환 <한겨레>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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