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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애 낳는데도 보증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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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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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NG 리포트

일러스트레이션/ 설은영
임신 6개월된 둘째아이를 갖고 3년 전 중국 땅을 처음 밟았다. 그때 나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이곳에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중국으로 유학이나 사업을 하러 떠나는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같이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비자를 받기 위해 신체검사를 하는데 병원의 간호사가 큰아이를 보고 하는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꼬마는 좋겠다. 엄마 아빠를 따라서 미국 가니 얼마나 좋으니?”

“누가 미국에 가요? 우리는 중국에 가는 거예요.”

이 말을 들은 간호사는 금세 표정이 바뀌더니 “중국에 가는데도 신체검사가 필요한가요?”라고 말했다. 중국과 같은 후진국에 가는데 무슨 검진이 필요하냐는 식이었다. 순간 기분이 나빴지만 내심 걱정되는 것은 중국이 그렇게 미개하다면 어떻게 거기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와서 내가 놀랐던 것은 위생상태나 의사들의 실력보다는 ‘환자’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였다. 일단 생명을 살리고 보자는 생각보다는 그 환자가 ‘돈’이 있느냐에 가치를 두고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외국인들이 병원을 가려면 ‘외국인 지정 병원’에 가야만 한다. 중일우호의원과 중독합작병원이 그곳이다. 물론 이곳에선 내국인에 비해 외국인은 진료비가 3배나 더 비싸다. 한국에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았던 나로서는 엄청난 의료비에 병원 가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아이를 낳을 때 보증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1만위안(한화 150만원)에 달하는 액수였다. 당시 학비와 생활비에 하루하루가 힘들던 나로서는 보증금 1만위안은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병원에 마지막 검진을 하러 갔을 때 의사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보증금을 반만 내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의사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며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결국 그 보증금을 마련해 병원으로 출산을 향해 가던 길은 11월의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얼어붙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 나는 중국사회의 이런 냉담함에 익숙해져버렸다. 처음에는 환자를 돈으로 보는 이 사회가 미웠고, 내가 여기에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싫었지만 보증금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선 병원 이외에도 어디나 보증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광천수를 살 때도 물통값으로 보증금 100위안(한화 1만5천원)을 내야 하고, LPG가스를 시킬 때도 가스통값으로 보증금을 내야 하고, 방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은행에서 신용카드를 발급할 때도 계좌에 일정 금액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돈’은 믿을 수 있지만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알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외국인에게만이 아니라 내국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불신풍조가 단순히 개혁개방 이후에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다만 그 현상이 개혁개방 이후 좀더 심해졌을 뿐이다. 요즘 중국에선 ‘처엉신’(誠信)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하는 이 단어는 중국인들에게 하루빨리 ‘신용사회’를 이룩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보증금이 필요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책으로 보는 세계|<안보의 공포 안에서>

아시아가 두려워

오스트레일리아의 2001년은 정권교체의 해가 되리라 모두들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집권 자유당에 대한 지지율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11월에 실시된 총선은 어이없게도 여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탐파 난민선 사태와 9·11 테러로 불어닥친 ‘안보 바람’이 야당에게 유리했던 교육, 의료, 세제 등의 이슈를 압도한 결과다. 뚜렷한 위협이 될 만한 적을 갖고 있지 않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안보라는 이슈가 총선 판세를 뒤집을 정도로 폭발적인 영향력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국제 정치학자인 앤서니 버크가 쓴 <안보의 공포 안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어 안보는 과연 어떤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갖는가를 다각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부제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저자는 월등한 군사력을 보유한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불안감이 오스트레일리아 안보정책의 근저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백인 국가로서 아시아권에 대해 가지는 문화적 우월감의 이면엔 고립된 국가로서의 군사적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100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창설의 중요한 명분 중 하나가 바로 아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수립이었다. 더구나,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다윈 공격은 아시아의 군사력에 무기력하게 유린당할 수도 있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군사적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 충격적 사건이었다. 비록 미국의 도움으로 위기에서는 벗어났으나 북쪽 나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현실화된 계기였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안보 콤플렉스가 외교정책은 물론 전반적인 사회정책에 극심한 악영향을 끼쳐왔다고 주장한다. 사회불안요소로 간주되던 원주민 말살정책이나 유색인종의 이민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백호주의 역시 안보 콤플렉스의 발로였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인도네시아와의 선린관계를 위해 동티모르에 대한 수십년간의 비인도적인 압제를 용인해온 오스트레일리아의 외교정책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과 부당한 희생을 바탕으로 추구된 안보는 그 자체가 비정상적이며 공포스런 권력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합리적인 균형감각이 국가안보를 이유로 묵살된 최근의 예로 보트피플에 대한 비인도적인 난민정책을 들고 있다. 유엔난민조약에 의해 보호해야 할 난민들을 영토주권을 침해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억압적 정책이 안보의 이름으로 채택된 것이다. 보트피플의 대부분이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출신 난민들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난민정책은 백호주의의 부활과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안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이러한 정책방향은 이웃 아시아 국가들과의 불필요한 마찰과 긴장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커 역설적으로 안보 불안요소가 될 수도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 책은 결론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가 추구해온 자유와 평등이라는 국가적 가치와 기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구시대적인 일방적 안보 개념을 버리고 인근 아시아 국가들과의 공존과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상호적인 안보 개념의 수립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시드니=정동철 통신원 djeo8085@mail.usyd.edu.au



베이징=황훈영 통신원 kkccjjh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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