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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우승 이후였다. 당시 미스아메리카대회의 주요 후원사는 수영복 기업인 ‘카탈리나’였다. 보통 우승자에겐 카탈리나의 신상 수영복 모델로서 전국 순회 등 홍보에 참여할 것이 강요됐다. 욜랜드는 이같은 내용을 포함한 표준계약서에 서명하는 일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미인대회 우승자가 수영복 포즈를 거부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수영하러 가는 게 아니라면 수영복 차림으로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거라며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오페라 가수다. 핀업 걸이 아니다!” 그 결과 카탈리나는 미스아메리카 후원사에서 물러났고, 라이벌 격인 미스유에스에이와 미스유니버스대회를 따로 개최하게 되었다. “욜랜드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미인대회 역사에서 잊혀졌던 ‘도덕적 적절성’을 지키기 위해 맞섰고, 미인대회의 미래를 바꾸었다.”(‘미스아메리카 웹사이트’의 공식 소개글) 더구나 흑발에 선이 다소 굵은 그녀의 외모는 당시 미국 미인대회 참가자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었다.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은 “이국적인 바스크 혈통의 외모”와 반항적 면모가 그녀를 “역사상 가장 비관습적인 미스아메리카”로 만들었다고 했다. 결혼으로 이어진 화려한 삶 욜랜드 마거릿 벳비즈는 1928년 11월28일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에서 태어났다. ‘욜랜드’는 어머니가 당시 읽고 있던 중세 역사 관련 책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버지는 스페인 바스크 혈통으로, 도축장을 운영했다. 욜랜드는 로마 가톨릭 수녀원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스프링힐칼리지에 재학 중이던 1949년 캠퍼스 미인대회인 ‘미스토치’에서 우승하면서 미인대회 경력을 시작했다. 그녀는 아마추어 오페라 가수였고, 철학을 공부했으며, 자신의 지성과 아름다움을 성공을 위한 기회로 이용하려는 태도가 강했다. 이후 미스앨라배마대회에 응시해, 뉴욕에서의 음악 공부를 위한 장학금을 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녀는 과거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미스앨라배마대회가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길이자, 남부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 중 하나였기 때문에 참가했다”며 “나는 내가 정말로 좋은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욜랜드는 결국 미스아메리카 우승까지 거머쥐었지만 전문 오페라 가수가 되지는 못했다(대회 중에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아리아를 부르기는 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사회운동가, 연극 제작자가 되는 데 이용했다. 욜랜드는 민권과 반핵운동 시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평시 간첩죄로 처형된 미국 최초의 사례인 1953년 ‘로젠버그 사건’ 당시, 그녀는 뉴욕 싱싱교도소 농성에 참여했다. 소련에 기밀을 넘긴 간첩 혐의로 수감된 줄리어스와 에셀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 집행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1960년에는 뉴욕 타임스퀘어의 대형마트 울워스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기도 했다. 인종차별이 심각한 지역인 미국 남부의 간이식당 인종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흑인 연좌농성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피켓을 들어올리는 사진이 당시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그녀는 “나는 남부 여자이지만, 생각하는 여자다”라고 말했다. 수영복 착용은 거부했지만, 그녀는 미스아메리카로서 친선대사 역할에 충실했다. 1951년 뉴욕의 허드슨 강물을 떠다가 파리의 센강에 붓는 ‘프랑스-미국 간 친선 행사’가 예정돼 있었다. 욜랜드는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 미인대회는 진정으로, 내가 프랑스 라파예트 장군(미국 독립운동의 영웅)에 대한 미국의 대답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물이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유리병에서 다 쏟아져버려, 호텔에서 수돗물을 다시 채워넣어야만 했다.”(<워싱턴포스트>) 1년의 미스아메리카 임기가 끝나고, 욜랜드는 뉴욕의 ‘뉴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 엔터테인먼트 사업가이자 한때 영화제작사 ‘유니버설픽처스’의 유망주였던 매슈 폭스와 결혼하면서 그녀의 ‘화려한 생활’이 시작됐다. 욜랜드는 뉴욕 맨해튼, 할리우드, 파리를 종횡무진하며 큰 재산을 모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영화계 스타들을 비롯해 문화·정치계의 고위층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녀는 오프브로드웨이의 한 극장을 운영하며 연극제작자로도 활동했다. 1964년 남편 매슈가 세상을 떠난 뒤, 욜랜드는 워싱턴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과거 대통령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의 소유였던 조지타운의 맨션을 구입해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으며, 지역사회 활동에 단골로 얼굴을 내미는 인사가 되었다. 욜랜드는 화려한 사교계 인사였고, 민주당 후원자였으며,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인종평등회의·전미건전핵정책위원회 등에도 참여했다. 그녀는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이자 탈식민 알제리의 첫 미국대사로 임명된 셰리프 구엘랄의 오랜 연인이었다. “욜랜드는 ‘정치계, 학계 유명 인사, 국제적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이미 팀을 꾸리고 있던 구엘랄의 인맥에 ‘쇼비즈니스 전문가’들을 추가했다.”(<워싱턴포스트>) 그녀는 구엘랄과 결혼하지 않았지만 2009년 사망 전까지 그를 자신의 배우자로 여겼다. “내 덕분에 미인대회는 변화했다” 욜랜드는 미스아메리카대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1960년대, 그녀는 미스아메리카대회에 윤리성과 인종적 다양성이 결여돼 있다며 “모든 미국인에게 열려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을 ‘미스아메리카’라고 부를 수 있겠나?”(<뉴욕타임스>)라고 말했다. 1970년대에도 그녀는 미인대회가 성차별적 태도를 지속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스아메리카대회는 점차 흑인과 아시아계 참가자들을 받아들였다. 1983년 바네사 윌리엄스가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우승자가 되었다. 욜랜드는 이같은 변화에 대한 자기 공치사에 후했다. 그녀는 2000년 <피플 매거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이 필요했을 때 미인대회에 반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내 덕분에 미인대회는 변화했다.” 이로사 객원기자 ※카카오톡에서 <한겨레21>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