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라이트 워치
자신, 두 딸, 어머니까지… 전쟁은 마시카 가족을 피해가지 않았다. 1998년 무장한 제복 차림의 남자들이 마시카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재산을 약탈했고, 남편을 살해했으며, 마시카와 당시 9살·13살이던 두 딸을 성폭행했다. 이후 마시카는 남편 가족으로부터 내쫓기고 의절당했으며, 6개월간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두 딸은 성폭행으로 임신을 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은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경우가 많다. 잔혹한 경험을 한 이후에도 낙인과 차별, 학대로 이중의 고통을 받는 것이다. 마시카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시즈 오브 호프>(Seeds of Hope·2013)를 만든 피오나 로이드 데이비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마시카의 센터에서 내가 대화를 나눈 대부분의 여성과 소녀들은 하나같이 자살을 생각했다고 했다. 끔찍한 일을 보고 겪은 뒤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거부된 이들이었다. 임신한 이들은 아이를 살해하고 싶어 했다.” 절망이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마시카는 강한 의지와 회복력을 갖고 있었다. 이듬해인 1999년 그녀는 도시와 멀리 떨어진 시골 지역인 남부 키부에 있는 자신의 집을 ‘경청의 집’(listening house)이란 이름으로 열고, 교전 지역의 성폭력 피해 여성과 그 가족을 위한 피신처로 삼았다. 그녀는 직접 공격당한 마을을 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생존자들을 찾았고, 여성과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는 자금을 모아, 생존자들과 함께 일을 시작할 땅을 마련했으며 재배한 농작물을 팔았다. 공동체는 성장해, 2002년 ‘APDUD’(발전을 위한 추방자의 연합)로 이름을 바꾸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회복과 의료 지원을 돕는 일을 계속했다. 현재, 이곳에는 약 50채의 집이 피신처를 제공하고 있다. 피해 여성과 아이들은 이곳에서 농작물을 가꾸고, 바느질을 배우고, 학교에 다니며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마시카의 활동은 국제구호기관과 활동가 등 많은 이에게 알려져 콩고 여성들의 현실이 세계에 드러났다. 도움을 주는 이는 많아졌지만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마시카의 활동은 여전히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결국 활동을 돕던 그녀의 어머니마저 성폭행당하고 살해되었다. 2009년에는 콩고민주공화국 군부로 새로이 흡수된 전 반군들이 찾아와 그녀를 의도적으로 다시 성폭행하고 구타했다. 이것으로 그녀는 1998년부터 네 차례나 성폭력을 당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위협은 상시적으로 이어졌지만, 마시카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생존 여성 찾아 몇 날 며칠 걸어서 마시카의 삶과 이야기를 기록한 데이비스 감독은 그녀의 사망 이후 미국의 비영리기구 ‘위기 보도에 관한 퓰리처센터’ 웹사이트에 기고한 글에서 그녀와 나눈 5년여의 기억을 풀어놓았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마시카와의 작업이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말없이 사라지거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했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직언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본 데이비스에게 첫인사로 “살이 더 쪘네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구호에 관한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놀라웠다”고 데이비스는 말한다. 이 작은 여성은 공격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몇날 며칠을 걸어서 산지의 외딴 마을에 생존자들을 찾으러 갔다. 공격이 있었다는 건 십중팔구 그곳의 여성들은 성폭행당하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거나 역시 성폭행당했음을 의미했다. 때때로 마시카는 그들을 직접 등에 업고 센터로 데려오거나 치료를 위해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 어느 날 마시카는 북부 키부의 고원에 위치한 우푸만두 마을이 공격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에 도착한 그녀는 불에 타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과 쓰러진 자리에 그대로 놓인 주검들을 보았다. 마시카는 그때 울음소리를 들었다. 산 것이라곤 없을 것 같은 광경 속에서, 동료들은 유령의 울음소리를 들은 거냐며 그 말을 무시했다. 그러나 마시카는 주검들 사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아이를 찾아냈다. 아이는 죽은 엄마의 가슴에 붙어 젖을 빨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안아올려 그녀의 센터로 데려왔고, ‘희망’(Espoir)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지금 ‘희망’은 건강히 자라나 학교에 다니고 있다. 마시카는 성폭력 피해로 태어난 18명의 아이를 입양했다. 많은 이들이 극한의 폭력적인 환경에서 그녀를 만나면서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다시는 경험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자금이 바닥났을 때도 센터에는 아이들이 넘쳤다. 현실적으로 돌봄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구호단체들이 더 이상 아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해도, 그녀는 “그들을 길가에서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요구를 묵살했다. 마시카가 자신을 희생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그녀 자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일이 나를 안정시킨다.” 데이비스 감독은 그녀가 집안에서 씻고, 옷을 입고,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그들을 돌보는 모습, 그들을 병원으로 데려가는 모습을 촬영하는 일이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고 말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나비기금’ 첫 수혜 2010년 마시카는 “혼란과 위험 가운데 긍정적이며 손에 잡히는 변화를 만들어낸 한 여성의 능력”을 인정받아 국제앰네스티의 여성과 아동 인권상인 ‘지네타 세이건’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함께 세계 전쟁 피해 여성을 돕겠다는 취지로 설립한 ‘나비기금’의 첫 지원 대상자로 선정됐다. 동료였던 국제인권단체 ‘프런트라인 디펜더스’의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콩고민주공화국에 사는 한 여성으로서) 취약함의 총체였으며, 힘과 희망의 총체이기도 했다. 나는 정말로, 그녀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로사 객원기자 ※카카오톡에서 <한겨레21>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