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지와 공유지가 섞인 추체파티와 달리 카트만두의 한 호텔이 사유지를 임시거주지로 내놓은 캠프호프는 호텔 매니저를 통해야 임시거주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특별’ 관리를 받고 있다. 추체파티 선조크네 천막과 달리 캠프호프의 천막은 해가 진 뒤 전기로 등불을 밝혔다. 지진 직후 330여 가구가 머물렀지만 이제 100여 가구가 남아 있다.
<유엔 디스패치>에 따르면, 4월과 5월 지진으로 발생한 이재민은 약 280만 명으로 네팔 인구(2700만 명)의 10%를 넘는다. 이들은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 등 수도권에서 세 들어 살거나 오래된 흙집에서 살던 도시 서민과 지진 진앙지 고르카와 가까운 북중부 산간 지역의 농민, 그리고 소상인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카드카나 카플레처럼 추체파티와 캠프호프에 남은 사람들은 집이 완전히 무너져 갈 곳이 없고 외부의 지원금 없이 홀로서기 어려운 이들이다. 지진이 발생하고 8개월이 지난 현재 네팔 전역에서 8천 명 이상이 정부의 거주지원금을 기다리며 임시천막에 머물고 있다. 국제사회가 네팔 피해 복구를 위해 내놓은 그 많은 구호자금은 어디로 간 걸까?
그 돈 약 41억달러(약 4조1천억원)는 반년 넘게 금고에 묶여 있다. 지원금 집행 권한을 가진 국가재건위원회(National Reconstruction Authority)의 출범이 늦어진 탓이다.
6월 네팔 정부가 국가재건위원회 설립에 관한 법령을 발의했지만, 의회 통과는 지진 발생 8개월 만인 12월14일에야 이뤄졌다. 정치세력 간 논란이 컸던 것이다. 네팔 제헌의회(575석) 451석을 점유한 주요 3당인 네팔의회당(196석), 네팔공산당-통일마르크스레닌주의자(CPN-UML·175석), 네팔통일공산당-마오주의자(UCPN-M·80석)가 힘겨루기를 했던 까닭은 국가재건위원회의 초법적 권한 때문이다.
이 법령은 빠른 재건과 복구를 위해 위원회가 토지 매입·등록, 공공물품 조달과 환경영향 평가에 대해 필요에 따라 기존 법규정을 넘어서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시민들은 국가 재난 상태에서도 자리 다툼을 하는 의회를 보고 기가 막힌다.
“자기 당이 네팔 지진 뒤 재건 복구 중심에 있었다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경쟁하는 거다. 다음 선거를 위해서. 한심한 일이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카트만두 주민 체링 돌커 구룽(26)의 말이다. 네팔 영자주간신문 <네팔리타임스> 편집장 겸 발행인 쿤다 딕시트는 “네팔인들은 한 번도 그들이 누릴 자격이 있는 정부를 가져본 적이 없다”며 “지난 20년간 대다수의 정치인들이 시민을 위해 봉사하지 않고 자기 잇속만 차려왔다”고 지적한다.
중국 접경 지역의 마을 타토파니의 한 주택에 지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 더해 네팔로 들어오는 건설 자재, 석유, 가스, 의약품, 식품 등 물자 수송이 3개월째 끊긴 것도 네팔의 2015년 겨울을 혹독하게 만들고 있다. 9월 중순부터 남부 평원 테라이 지역 및 마데시족을 기반으로 한 정당들이 네팔-인도 국경을 봉쇄하고 연좌 시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내륙국가 네팔은 전체 교역량의 절대다수를 육로 수송에 의존한다. 남쪽으로 국경을 맞댄 인도는 네팔 전체 무역량의 절반 이상이 통과하는 생명줄 같은 중간 교역국이다. 석유는 전량을 인도에서 수입해왔다. 특히 네팔로 들어오는 석유와 가스의 3분의 2가 통과하는 육로무역 거점인 남쪽 접경도시 비르간즈가 막혀 카트만두를 비롯한 전국이 연료난과 의약품난을 겪고 있다.
지난 90일간 국경 봉쇄 시위를 이어온 테라이-마데시 정당도 나름 사연을 갖고 있다. 8년 동안 준비하여 2015년 9월20일 채택된 네팔연방민주공화국의 초대 헌법이 네팔 사회에서 소외받던 테라이 지역 주민이나 약자를 충분히 배려하지 않고 있다고 이들은 비판한다. 이들 정당이 정부와 의회에 요구하는 것은 인구에 맞는 선거구와 의원 수 배정이다.
네팔보다 4년 일찍 1947년 공화국으로 독립한 인도는 1951년 네팔이 라나 왕조의 절대왕정제를 끝내고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할 때부터 네팔의 큰형 노릇을 해왔다. 이것은 대학을 졸업한 네팔 시민들이 인도의 네팔 내정 간섭, 대등하지 못한 네팔-인도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거슬러 올라가는 양국 관계의 기원이다.
네팔의 카트만두 정치 지도자들이 중요한 정치적 교섭, 대규모 시위나 봉기 등을 결정하기 전에 인도 뉴델리를 찾아가던 ‘전통’이 현재 네팔 총리나 대통령이 취임 뒤 가장 먼저 인도를 방문해야 하는 ‘의무’가 됐다는 것이다.
최근 3개월째 이어지는 네팔-인도 국경 봉쇄가 인도 정부의 용인 없이 테라이-마데시 정당의 의지만으로 감행할 수 없다는 추론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1989년 인도가 무려 1년6개월 가까이 네팔과의 교역로를 막고 네팔이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견제했던 경험도 이런 정황적 결론의 근거다.
그러나 3개월째 석유와 가스가 원활히 공급되지 못하는 네팔 주요 도시의 사정은 외부 방문객의 눈에는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도로 위에 오토바이와 자가용, 버스가 다니고 식당에 들어가면 음식을 조리해 팔고 있기 때문이다.
네팔-인도 국경 봉쇄로 인한 연료난과 의약품난은 방문객이 아닌 주민들이 평범한 일상에서 실감하는 ‘더디게 진행되는 재난’이다. 10월29일부터 12월22일까지 기자가 두 달간 살면서 지켜본 에너지난은 천천히 목을 조여오듯 파고들어 일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복구 못하고 나무로 받친 집과 사원
재건 공사를 하지 못한 건물에 나무 막대기를 지지대 삼아 받쳐뒀다.
보통 두 달 반을 쓰는 14kg짜리 가정용 가스통은 원래 가격 3천루피(약 3만원)에서 국경 봉쇄 뒤 1만루피(약 10만원)로 뛰었다. 석유는 평시 1ℓ에 104루피(약 1040원)였던 것이 국경 봉쇄 뒤 250루피(약 2500원)로 올랐다.
두 배 이상 오른 연료 가격이 부담스러워 많은 사람들이 전기화로와 전기밥솥, 전기히터 등 가정용 조리기구를 장만했지만 갑작스레 늘어난 전력 사용량 때문에 주택가 정전은 하루 14시간 이상으로 잦아졌다. “추운 겨울 조리부터 난방까지 모든 것을 전기에 의존하니 전기세 청구서 받기가 겁난다. 그래도 전기마저 없으면 뭘 먹고 어떻게 살겠나.” 주민 크리슈나 고팔 아왈레(46)의 말이다.
4월 지진의 여파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주택과 사원들은 길고 두꺼운 나무로 지지대를 받쳤을 뿐 복구나 수리 할 엄두를 내기 어렵다. 건설 자재를 옮기는 차량에 댈 석유가 부족하고, 암시장에서 산 비싼 석유로 비싼 자재를 대서 겨울에 공사 하느니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 더 많다.
진앙지에 가까웠던 중부 람중에서도 지진으로 무너진 학교와 집을 다시 짓는 데 쓰일 석유와 건설 자재비가 두 배 이상 뛰어 4월과 5월에 모금한 예산으론 복구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 됐다. “국경이 막혀 이렇게 된 사정을 미국에 있는 기부단체와 개인들이 이해해줄지 모르겠다. 겨울이 오기 전에 집과 학교를 지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모금을 했다.” 로터리클럽 람중 지회장 후마 구룽(35)의 말이다.
12월26일부터 30일에 걸쳐 만난 네팔 중북부 고르카 지역 주민들은 4월 지진과 9월 국경 봉쇄의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지진과 산사태 이후 산간 주민과 등산객들이 이용하던 길이 무너져내렸고, 구호물자를 공급하는 헬기가 산간 벽지에 사는 주민 7600여 명의 생명줄이 됐다.
고르카의 마나슬루 보호구역을 V자로 가르는 서쪽 누브리 계곡의 가프 마을과 동쪽 춤 계곡의 시프체트 마을은 지진과 산사태로 고립됐다. 가프 마을의 누브리 중·고등 기숙학교 학생 100여 명은 지진으로 무너진 학교 건물 대신 천막에서 숙식하며 수업을 받았다. 그나마도 최근엔 한 달간 겨울방학으로 문을 닫았다.
시프체트 마을 37가구 주민들은 모두 임시천막에서 생활하며 겨울을 나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겨우내 먹을 것과 입을 것 걱정이 크다. “더 추워지기 전에 더 많은 마을에 담요, 옷, 쌀과 콩 등을 전달해야 하는데 연료가 비싸고 귀해져서 우리 같은 현장 요원들은 마음이 바쁘다.” 고르카에서 활동 중인 체코 구호단체 PIN(People In Need) 엔지니어 아시스 슈레스타의 말이다.
국경 봉쇄가 두 달째 이어지자 유엔아동기금(UNICEF)도 보도자료를 냈다. 11월30일 유엔아동기금은 “이번 겨울, 연료·식량·의약품 부족으로 300만 명 이상의 네팔 어린이들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네팔의 주요 도시 병원들은 네팔-인도 국경 봉쇄의 여파로 구급차 운행과 수술 일정을 평소의 절반 이하로 줄였다. 10월 말 비르병원, 트리부반대의과대부속병원(TUTH), 파탄 병원, 칸티어린이병원 등 네팔의 주요 병원들은 긴급회동을 갖고, ‘인도 국경 차단으로 인한 장기간 네팔 경제 봉쇄 결과 산소통, 의약품, 디젤 등 병원에 중요한 물자가 부족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내용의 공동탄원서를 총리실에 냈다.
허술한 법규정이 가장 큰 문제
네팔은 2015년 1월15일, 벽돌집과 사원, 건축물이 무너져 1만7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진도 8.3의 1934년 대지진 80주기를 맞았다. 석 달 뒤인 4월25일 카트만두와 인근에서 진도 7.8의 대지진으로 8617명이 목숨을 잃었다. 네팔에서 매년 1월15일은 ‘지진의 날’로 지정돼 있고 80년을 주기로 카트만두에 대지진이 온다는 것은 지질학자 같은 전문가들부터 동네 어르신의 입에 오르던 초감각적 슬기였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1934년과 2015년 네팔에서 인명을 앗아간 것은 지진이 아니라 그런 지진이 예상됨에도 허술하게 지어진 집과 이런 건축을 허용한 법규정이라고 지적한다. 그 결과 발생한 지진 피해자와 이재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국가재건위의 뒤늦은 출범과 네팔-인도 국경 봉쇄로 인해 이들에게 다가온 겨울은 길고 고달프다.
글·사진 파탄(네팔)=이슬기 <네팔리타임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