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복전쟁 참전반대 시위대와 유대교 시위대의 충돌로 본 독일의 과거사 인식 변화
지난 12월1일 토요일 정오. 베를린 중심에 자리한 유대교 예배당 앞에서는 참으로 서글픈 ‘거리의 전투’가 진행되었다. 히틀러가 유대인 탄압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불태웠던 바로 그 예배당 앞에서 독일 신나치 단체들의 도발적인 시위가 허가됐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반대 데모대들이 모여들었다.
"점령군 군사작전 파병은 굴욕"
안식일인 토요일을 맞아 예배를 마친 유대교인들도 ‘성지 사수’를 위해 데모대에 합류했고, 멀리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날아온 유대인들도 이 투쟁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정작 충돌은, 신나치 시위대와 반대 데모대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들 사이의 격렬한 충돌을 우려한 경찰이 유대교 예배당 앞에 모인 반대 데모대를 이른바 ‘쓸어내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졌다. 한쪽에서는 물대포와 최루가스가, 반대쪽에서는 이에 맞선 돌멩이와 빈 병들이 삽시간에 전통적인 유대인의 거리를 흔들어 놓았다. 경찰의 철거 장갑차가 뿌연 연기를 가득 내뿜으며 등장하자, 노년의 라비들이 두 팔을 들며 이를 가로막았고, 뒤편의 데모대는 “나치를 몰아내자”를 외치며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이들을 한명씩 떼어내면서 해산을 시도하던 바로 그때, 이곳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곳에선 신나치 시위대가 유유히 행진하고 있었다.
이날 신나치 계열의 ‘민족민주당’(NPD)의 주도 아래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전후 최대 규모인 3500여명에 이르렀다. 신나치의 상징이 되어버린 스킨헤드족 외에도 점잖아 보이는 중년의 인사들도 시위대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민족민주당의 한 연사는, “이제 수세적인 단계는 끝났다. 좀더 공세적인 방어와 확대 전략을 펼쳐야 할 때이다”라며 열변을 토했다. 금지곡인 <나치 친위대 SS에 영광있으라>의 멜로디가 흘러퍼지는 가운데, 시위대는 “U! S! A!, 국제 학살자 집단!”, “아프가니스탄 민중과 연대를!” 등의 구호를 연신 외쳐댔다. 이들에게, 미군은 나치정권을 몰락시킨 ‘점령군’이었고, 따라서 이 점령군의 군사작전에 ‘신성한 독일군대’를 파병한다는 것 자체가 굴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독일의회가 아프가니스탄에 독일군 3900명 파병 결정을 내리기까지 진행된 논쟁들은 시대 변화의 징표일 것이다. 그러나 이의 역사적 의미는 독일 언론들이 논평하듯 유럽 영토 밖의 첫 번째 군사작전이라는 것보다 나치 과거사와 무관하게 파병 찬반 논쟁이 진행되었다는 점에 있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의 파병 요청을 우파 기민당(CDU) 출신의 전 헬무트 콜 총리는 과거사를 근거로 이를 거절했었다. “속죄의 비밀은 기억에 있다”라는 탈무드의 가르침은 좌우를 떠나 수많은 독일 정치인들이 즐겨 사용한 수사문구였고, 이들은 마치 누가 역사의식을 가진 훌륭한 정치인인가를 겨루기라도 하듯, 나치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현재와 연관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90년대 들어서도 독일사회에서는 반성의 노력들이 계속 이어졌다. 동유럽 출신의 나치 강제 노역자들에 대한 배상을 시작하였고, 베를린에 유대인 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며, 또한 국회의사당 건너편에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비’ 건축이 시작되었다. 이는 독일인들에게 마침내 독일이 충분한 반성을 통해 과거사 극복의 종착역에 도착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제 충분히 반성했다? 독일 통일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주변국들은 ‘대국 독일’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다시 하나되는 것을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정상화’ 과정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통일 뒤 11년이 지난 오늘날 슈뢰더 독일 총리는, 3900명의 독일군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파병함으로써 ‘정상화된 신독일’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정상화’를 요시카 피셔 외무장관은 “우리는 이제 성인이 되었다”라고 돌려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피셔 장관이 사용한 ‘성인’이라는 은유에서, 70~80년대 독일 평화운동의 전통, 치열한 나치역사에 대한 반성 등 독일정부의 노력들을 얼치기 사춘기의 탈선으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베를린=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

사진/ 12월1일에 열린 신나치 시위(위/ 김정수)와 반대시위(아래). 신나치들은 역설적이게도 파병 반대를 외쳤다.
이날 신나치 계열의 ‘민족민주당’(NPD)의 주도 아래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전후 최대 규모인 3500여명에 이르렀다. 신나치의 상징이 되어버린 스킨헤드족 외에도 점잖아 보이는 중년의 인사들도 시위대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민족민주당의 한 연사는, “이제 수세적인 단계는 끝났다. 좀더 공세적인 방어와 확대 전략을 펼쳐야 할 때이다”라며 열변을 토했다. 금지곡인 <나치 친위대 SS에 영광있으라>의 멜로디가 흘러퍼지는 가운데, 시위대는 “U! S! A!, 국제 학살자 집단!”, “아프가니스탄 민중과 연대를!” 등의 구호를 연신 외쳐댔다. 이들에게, 미군은 나치정권을 몰락시킨 ‘점령군’이었고, 따라서 이 점령군의 군사작전에 ‘신성한 독일군대’를 파병한다는 것 자체가 굴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독일의회가 아프가니스탄에 독일군 3900명 파병 결정을 내리기까지 진행된 논쟁들은 시대 변화의 징표일 것이다. 그러나 이의 역사적 의미는 독일 언론들이 논평하듯 유럽 영토 밖의 첫 번째 군사작전이라는 것보다 나치 과거사와 무관하게 파병 찬반 논쟁이 진행되었다는 점에 있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의 파병 요청을 우파 기민당(CDU) 출신의 전 헬무트 콜 총리는 과거사를 근거로 이를 거절했었다. “속죄의 비밀은 기억에 있다”라는 탈무드의 가르침은 좌우를 떠나 수많은 독일 정치인들이 즐겨 사용한 수사문구였고, 이들은 마치 누가 역사의식을 가진 훌륭한 정치인인가를 겨루기라도 하듯, 나치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현재와 연관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90년대 들어서도 독일사회에서는 반성의 노력들이 계속 이어졌다. 동유럽 출신의 나치 강제 노역자들에 대한 배상을 시작하였고, 베를린에 유대인 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며, 또한 국회의사당 건너편에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비’ 건축이 시작되었다. 이는 독일인들에게 마침내 독일이 충분한 반성을 통해 과거사 극복의 종착역에 도착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제 충분히 반성했다? 독일 통일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주변국들은 ‘대국 독일’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다시 하나되는 것을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정상화’ 과정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통일 뒤 11년이 지난 오늘날 슈뢰더 독일 총리는, 3900명의 독일군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파병함으로써 ‘정상화된 신독일’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정상화’를 요시카 피셔 외무장관은 “우리는 이제 성인이 되었다”라고 돌려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피셔 장관이 사용한 ‘성인’이라는 은유에서, 70~80년대 독일 평화운동의 전통, 치열한 나치역사에 대한 반성 등 독일정부의 노력들을 얼치기 사춘기의 탈선으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베를린=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