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대지진의 진앙지인 고르카 지역 출신의 네팔인들은 고향 마을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귀향길에 올랐다. 대지진이 네팔을 강타한 다음날인 4월26일 이른 아침, 이들은 출발했다. 20여 명이 탄 차는 낙석을 피하느라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다. 험한 길마저 산사태로 끊어져 여자와 아이들까지 등에 짐을 메고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걸어갔다. 그 길 위로 폭우까지 쏟아졌다. 사흘 만에 도착한 고향의 모습은 처참했다. 집은 완전히 무너져내려 그 흔적만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네팔인들이 고향으로 가는 여정을 사진가 신동필씨가 동행취재했다. 신씨는 지난 3월30일 네팔을 방문했다가 안나푸르나가 가장 가까이에서 보이는 고지대 마낭 마을에서 지진을 경험했다. 네팔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5월8일(현지시각) 현재 7885명, 부상자는 1만7803명으로 집계됐다. 편집자
해발고도 2670m의 차메의 비탈진 곳에 세워진 지프형 차량 화물칸에 올라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네팔인. 이들은 지진 발생 뒤 멀리는 고도 4020m의 야크카르카로부터 밤길을 걸어왔다.
그래, 진앙지 고르카로 가자
며칠 전 전통 소주를 놓고 대작했던 네팔인은 자신의 아름다운 고향 고르카에 꼭 방문해달라고 말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직선거리로 100km 정도이지만 산을 돌아가면 통상 4~5일이 걸린다. 지도로만 봐도 험난한 지형이다. 그러나 카트만두에서 출발하는 것보다는 분명 가깝다. 그래, 지진의 진앙지 고르카로 가자. 고르카는 1768년 24개의 독립 왕국을 최초로 통일한 프리트비 나라얀 샤 왕이 태어난 곳이다. 나라를 통일했던 왕국의 수도라지만 작은 산골마을이다.
4월27일 아침 7시 차메 마을. 천막이 쳐져 있는 공터 주변으로 네팔인 30여 명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모여 있다. 고르카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향 마을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던 일을 멈추고 밤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다. 그러나 지프차 운전사는 평소 500루피인 교통비를 비상사태라며 2500루피(약 3만원)로 올리겠다고 했다. 낙석을 피해 험한 길을 달리는 것치고는 저렴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달 급여가 5천∼8천루피인 이들에겐 엄청난 폭리다. 항의가 빗발쳤고 2시간 만에 차가 출발했다.
이른 아침부터 대기하느라 변변하게 먹지도 못한 상태라 허기가 느껴졌다. 카메라 가방 속에 든 초콜릿 생각이 간절하지만 차를 세우기도 혼자 먹기도 난감해서 꾹꾹 참고 있는데, 구멍가게 앞에서 잠시 차를 세운다. 얼른 지갑에서 잔돈을 꺼내 뒷좌석의 여자에게 아무거나 사라고 했다. 내가 사는 것보다 두세 배 더 많이 네팔 라면을 사왔다. 함께 나눠먹고 허기를 달랬다.
오전 10시30분 지프차 4대에 나눠 출발한 일행은 오후 6시에야 베시사하르에서 여장을 풀었다①. 모두 휴대전화에 매달려 지진과 고향 소식을 검색한다③. 네팔 정부는 4월28일부터 사흘간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지만, 베시사하르에선 음악이 울려퍼졌다. 살아 있다는 표현이고 슬픔을 극복하려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방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여진이 왔다, 손톱이 잘렸다
새벽 4시 여진이 왔다. 비명 소리에 놀라 중요 장비만 챙겨 문을 열다가 손톱이 잘려나갔다. 여진은 1~2분 만에 잠잠해졌지만 다들 잠을 청하지 못하고 먼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아침 6시 고르카행 버스에 올랐다. 가로질러 가면 가까운 거리지만 높은 산이 가로막아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굼레를 지나 카트만두 방향으로 달리던 버스의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타이어 교체를 기다리는 모습이 다들 초조해 보였다.
전날 과자를 나눠먹었던 친구들이 오이를 사서 반으로 잘라 준다. 그러고 보니 다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타이어를 교체한 뒤 지누우리로 향했다. 먼지 낀 창밖으로 지진의 진앙지임을 확인시켜주듯 무너진 건물과 벽에 금이 간 건물들이 하나둘 보였다. 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②. 남자들이 내려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길을 걸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트랙터를 탔지만 길은 험했다. 주검을 운구하는 행렬과 마주쳤다. 부상자를 업고 아랫동네로 가는 사람들도 보였다④. 일행은 동요했고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우려했던 비가 내렸다. 먼 산을 보니 검은 구름이 자욱했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배낭이 비에 젖었고 몇몇이 비닐을 뒤집어썼다. 빗줄기가 더욱 강해졌다. 더 이상 갈 수 없어 민가 천막에서 비를 피했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린 지 1시간. 족히 20kg이 넘는 대나무 바구니를 등에 진 여자들이 기어이 출발한다. 이제부터 믿을 것은 나 자신뿐이다. 산사태 지역을 뛰어서 통과했다. 배낭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40~50분을 걸어 도착한 발루와 마을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배낭을 내리자마자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가랑비 속에서 부서진 집을 손질하고 쓸 만한 물건을 건지는 사람들이 카메라 파인더에 들어왔다⑤⑥. 성한 건물이라고는 약국뿐이었다. 철근 다리가 있는데 교각이 무너져 건너갈 수 없었다. 일행 몇몇과 차오면(채소와 면을 기름에 볶은 요리)을 먹는데 한 사람이 내게 충고했다⑦. “내일 돌아가는 게 좋겠다. 지금 아주 위험하다.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한숨이 나왔다.
진심 어린 걱정은 이어졌다. 그들도 길이 이렇게 끊긴 줄 몰랐다고 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란다. 이곳 780m 고지에서 2천m가 넘는 산을 올라갔다가 하산해서 다시 2500m 고지까지 가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린다. 고산에서 나고 자라 폐활량이 크고 온갖 추위에 단련된 이들이 하루 종일 걸어도 도저히 갈 수 없는 먼 거리다. 비까지 내리니 더욱 그렇다. 암담했다. 내게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자 허무함이 몰려왔다.
그때 산타가 나타났다. “내일 서너 시간만 더 갔다가 돌아가면 어떨까? 우리 마을까지는 내가 안내하겠다.” 산타 바두르 구릉(32)은 자신의 고향인 포카리까지 가자고 권유했다. 고마웠다. 그래, 여기까지 아무도 오지 않은 길을 온 것만으로 만족하자. 처음부터 일행의 고향과 가족을 보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렇게 정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무너진 집, 그의 무거운 침묵
날이 밝자 하나 둘 길을 떠났다. 걸음이 느린 여자들이 먼저 출발하고 건장한 남자가 맨 마지막에 빗속에서 손을 흔들며 카메라 파인더 속에서 점점 작아졌다. 가슴이 먹먹했다. “행운을 빈다, 행복하길!”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일행이 모두 떠나고 산타와 나만 남았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산타가 맥주 한 병을 다 마시더니 출발하자고 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불안해졌다. 자기 집이 걱정되는가보다. 나도 서둘렀다.
갈라지고 비탈진 벼랑길을 걸었다. 앞장선 산타는 돌이 구르지 않게 조심했다. 뒷사람을 배려하는 그의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길을 따라 두어 시간을 더 오르자 산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향 마을이 저만치서 보인 것이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헉헉거리며 나는 바짝 뒤쫓았다. 그가 고향의 부모와 처자식을 만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동네 어귀에서 만난 여인이 굵은 눈물을 흘리며 마을 상황을 설명했다. 작은 몸집의 산타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내 집이다”(This is my house). 그가 등산 스틱에 턱을 괴고 말했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무너지다 만 담장에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뒤쪽에는 그의 가족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①.
마낭에서 포카리 마을까지의 여정
카메라를 팔아서라도 지어주리라
4월30일 떠나는 날, 산타가 그의 아내와 함께 뒤따랐다. 돌아가라고 하는데도 발루와 마을에서 구입할 것이 있다고 우겨댔다. 대형 산사태가 났던 그 철근 다리 앞에 도달했다. 이별하기에 좋은 곳이다. 산타를 부둥켜안았다. 가난한 사람의 온기가 전해졌다. 멀어져가는 그를 보며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6년을 타지에서 일해 번 돈(330만원)으로 지은 두 채의 집, 지은 지 25일 만에 무너진 그의 집을, 내 카메라를 팔아서라도 다시 튼튼하게 지어주리라.
글·사진 신동필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