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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명예만 있는 명예총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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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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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세계|재외공관 긴급진단

모스크바까지 ‘여권 재발급 여행’을 가야 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교민들

사진/ 상트레테르부르크 발사야 모르스카야 거리에 위치해 있는 명예총영사관. 사소한 행정업무도 처리할 수 없다.
지난해와 올해를 기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카레야’(한국)라는 단어는 심심찮게 인구에 회자돼왔다. 한-러수교 10주년을 맞았던 지난해, 모스크바보다는 규모가 적었지만 정부 차원의 기념 학술회의, 무료 한국영화 상영 등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해 한국 알리기 작업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한 덕택이다.

현지민들의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한-러수교가 10주년이 되도록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제대로 된 공관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정부가 무관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작 올 2월 현지에 ‘명예총영사관’을 개설했지만 문제는 이것이 정식 공관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기보다는 이름 그대로 ‘명예적’인 기능에 한정돼 있다는 데에 있다.


여론조사 결과 현지 주민들 혼란

역설적이게도 현지 러시아 주민들은 이곳에 당연히 영사업무 등 정식 기능을 하는 한국공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한겨레21>이 최근 러시아의 전국사회여론조사기관 상트페테르부르크지부인 ‘토이-오피니언’에 간단한 전화조사를 의뢰한 결과 질문대상자 100명 중에서 80%가 한국을 알고 있고 이곳에 한국총영사관이 있다고 확신한다고 응답했다. 이 응답자들 중에서 실제 한국행을 시도했거나 한국 기업과의 연락을 목적으로 한국총영사관을 찾으려 시도했던 이들이 대략 30% 정도를 차지했는데, 끝내 그 소재지를 몰라 현지 여행사 등 대행기관에 의뢰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이 조사가 알려주듯 정식 총영사관이 없음으로 인해 현지인들이 겪는 가장 큰 고충은 제반 영사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스크바대사관까지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유사한 고충은 현지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도 적용된다. 유효기한 5년인 일반여권을 가지고 현지에 유학온 대부분의 장기 유학생들은 여권 재발급을 신청할 때와 찾을 때를 합쳐 최소한 두번은 모스크바로 여권변경 여행을 해야 한다. 현지 지사가 겪는 고충과 경제적인 손실도 만만찮다. LG그룹계열의 한 지사 직원으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는 한모씨의 말에 의하면 한국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전문가를 단기적으로 초빙하는 경우 순수 영사업무에 할당되는 시간은 대략 10일이고 그에 따라 업무경비도 배가된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비근한 예로 한국여행을 전담하는 현지 여행사 ‘오르비타’ 대표 이리나 바실리에브나의 주업무는 영사업무를 위해 모스크바대사관을 왕래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사무실에 그가 머무르는 시간은 실제로 거의 없다. 그는 “다행히 성수기에 여행자가 많을 때는 제법 모스크바로 출장가는 기분이 나지만 요즘같이 손님이 드문 때는 여권 한두개를 가지고 모스크바를 가야 하는데 차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대사관과도 불편한 관계

이름뿐인 ‘명예’ 때문에 현지 명예총영사관도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모든 사소한 사건, 사고 등 한국 혹은 한국민과 관련된 자잘한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현지 치안당국, 관세당국은 어김없이 명예총영사관에 그 자초지종을 문의하곤 한다. 실제로는 아무런 기능이 없는 명예총영사관이 할 수 있는 일은 “미안하다. 알아보도록 하겠다”는 말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가 이같은 문의의 도가 지나치면 명예총영사관도 같이 유감을 표시하는 게 상례이다.

유사한 관계가 현지 명예총영사관과 모스크바대사관 직원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명예총영사관 개설 이후 모스크바대사관 직원들로부터 업무협조 요청이 부쩍 늘었지만 이에 대해 현지 교포 출신 김기음 명예총영사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표시한다. “실제로 내가 기능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 현지의 자잘한 일말고도 대사 혹은 차관급 이상의 인사들이 내게 의뢰하는 일이 많아 이를 다 소화하기도 힘들다”는 게 그의 불만이다.

대사관 직원들도 나름대로의 논리를 내세운다. “대한민국 정부가 현재 여건을 고려해서 ‘명예적’이기는 하지만 현지에 총영사관을 개설했으면 대사관 업무의 원활한 수행에 비록 ‘정치적으로 반짝거리는 일’은 아닐지라도 적극 협조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한 관계자는 토로한다. 대사관과 명예총영사관의 원활하지 못한 관계를 읽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글·사진 박현봉 통신원 parkhb_spb@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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