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코소보의 감춰진 진실

384
등록 : 2001-11-14 00:00 수정 :

크게 작게

기획연재|슬픈 발칸(하)-코소보

유고 개입을 위해 CIA가 의도적으로 반군 지원… 평화를 부르짖는 나토의 더러운 속내

사진/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시위를 통해 코소보평화유지군에 자신들의 독립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코소보는 중세 이후 세르비아의 정신적인 수도로서 1천여개나 되는 수도원과 정교회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발칸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매년 순례하던 성지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이 지역은 세르비아의 영토로 인정받아왔다. 1차대전이 끝나면서 코소보는 여전히 세르비아의 영토로서 국제적으로 재확인받았다.

알바니아인들은 언제나 코소보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해왔다. 1389년 코소보 벌판에서 벌어진 한판 승부에서 세르비아가 오스만제국에 무릎을 꿇고 난 뒤 이 지역은 450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점령지가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터키는 알바니아까지 정복하여 알바니아 민족 대부분을 무슬림으로 개종시켰다. 연이어 취했던 정책이 알바니아인들을 코소보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알바니아인들이 대규모로 이 지역으로 밀려든 이때 동시에 세르비아인들이 대규모로 코소보에서 추방당했다.


베트남 용병들이 코소보에 모인 이유

1차대전 뒤 오스만제국이 몰락하고 세르비아민족이 돌아오면서 그들이 코소보 인구의 반을 차지하게 됐으나 2차대전중 이 지역을 점령했던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30만명 이상의 세르비아인들이 추방당하게 된다. 민족의 형식적 봉합에만 신경썼던 티토는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로 돌아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코소보 인구의 다수를 알바니아 민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세르비아 영토에 90%의 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마침내 유고 정부가 더이상 알바니아인들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알바니아인들의 저항에 견디다 못한 유고 정부는 1974년에 코소보를 자치주로 인정해주었다

유고의 자치주가 된 코소보는 중앙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백분 활용했다. 코소보의 프리스티나대학에서는 당시 알바니아 정권이 ‘대알바니아’의 관점에서 편집한 수천권의 교과서를 들여와 알바니아 학생들의 학사과정에 사용했다. 즉 코소보를 알바니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키려는 이론적인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프리스티나대학 출신 중 상당수가 현재 코소보해방군(KLA)과 마케도니아의 민족해방군(NLA)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발칸지부장을 역임했던 크리스 헤지스가 KLA의 구성원들에 대해 소개한 것을 보면 대략 두 종류로 나뉜다. 먼저 알바니아 우익전사들의 아들이나 손자들을 꼽을 수 있는데 2차대전 당시 파시스트쪽에 가담했거나 나치에 의해 만들어졌던 SS부대에 자발적으로 참가했던 사람들의 자손이거나 80년 전에 세르비아에 대항해서 봉기했던 알바니아 우익들의 자손이다. 또다른 그룹은 소수의 좌익공산주의자들로서 우익과 마케도니아의 소수 알바니아 민족들을 위한 전투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수의 우파들과 심각하게 대립해왔다.

90년대 초 KLA가 창설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미국중앙정보부(CIA)와 독일정보부(BND)였다. BND에 의해 독일 군복과 동독의 무기들, 마약밀수를 통해 세탁된 돈 등이 KLA에 지원됐다. BND의 비밀활동은 독일 정부의 발칸 진출을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CIA와 BND는 상호 역할분담까지 할 정도로 KLA 창설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BND가 주로 군수품 공급을 맡았다면 CIA는 군사훈련 부문에 집중했다. 시골 출신의 코소보 알바니아 청년들을 직업적인 게릴라전사로 키우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열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외부전문가들의 전문적인 조언과 교육이 필요한데 이를 CIA에서 맡았다. 왕년의 베트남전 출신 예비역 용병들을 데려와서는 알바니아 청년들을 게릴라전사로 훈련시켰다.

마피아와 거래했다는 의혹도

사진/ 코소보 어린이가 그린 전쟁그림. 코소보 전쟁의 불씨는 CIA 의 공작이었다.
올해 들어서 시작된 마케도니아분쟁에서 확인됐던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지난 6월25일 스코페에서 20km 떨어진 알파치노보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은 알바니아 게릴라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알바니아 게릴라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이들을 체포하려는 순간 미군이 들어와 알바니아 게릴라들을 구출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알바니아 게릴라들과 뒤섞여 있던 미국 용병들을 쉽게 구별해낼 수 있었다. 미군이 개입하여 알바니아 게릴라들을 구출해간 이유는 알바니아 청년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겼다기보다는 ‘미국 시민’인 미국 용병들의 목숨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약소민족의 설움을 톡톡히 맛보아야 했던 마케도니아 국민들은 그날 밤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가서 마케도니아 정부에 화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에 의해 90년에 취해진 금수조치는 유고슬라비아의 경제에 암운을 드리웠고 이런 경제적 파탄상태는 코소보의 알바니아 청년들을 알바니아에 있던 KLA 훈련장으로 가게 만든 조건이 되었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뒤 배치된 게릴라전사들은 일정한 보수가 주어졌기 때문에 실업자로 있느니 차라리 게릴라전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KLA가 이렇게 막강한 자금력을 배경으로 3만명이나 되는 코소보의 알바니아 청년들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은 전세계에 네트워크를 갖춘 알바니아 마피아의 지원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유럽으로 공급되는 마약의 70%가 터키에서 공급되는데 이 마약은 알바니아 마피아의 중개를 거쳐 이탈리아 마피아로 넘겨진다. 알려진 바로는 이 마약밀수사업의 규모가 자그마치 70억달러나 된다고 한다. 지금도 CIA를 비롯한 유럽의 정보기관들은 이를 방관하든지 아니면 아예 함께 ‘동업’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1998년 공식적으로 삭제되기 전까지 오사마 빈 라덴과 관련됐다는 혐의로 KLA는 미 국무성의 테러단체명부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즉, 당시 테러단체였던 KLA를 CIA가 지원했다는 얘기가 된다. 미국 정부가 합법화한 KLA는 이후 알바니아에서 공급됐던 중국제, 옛소련제 낡은 무기들을 버리고 신형 미제 무기들로 무장하한다.

밀로셰비치가 정권을 잡은 뒤 하나둘 유고슬라비아연방을 이탈해가던 시기 코소보에서는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에 의해서 희롱당하는 사례가 종종 일어났고 이에 항의하는 세르비아인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세르비아 경찰이 세르비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알바니아인들과 충돌하게 되고 급기야 대규모 알바니아인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이 와중에서 걷잡을 수 없는 시위로 발전되자 세르비아에서 군대가 파견되면서 KLA와 무장충돌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코소보전쟁의 시작이다. 온갖 전시선전이 난무하고 양편의 난민들이 줄을 잇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서방언론매체들의 전시선전과 달리 밀로셰비치는 전쟁을 원치 않았고 가능하면 자존심을 세우는 방향에서 평화적인 타결을 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단지 이 분쟁을 나토군이 합법적으로 주둔할 명분으로 이용했다.

클린턴도 전범이다

당시 홀부르크가 중재한 안은 합법적인 나토군의 주둔을 가능케 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즉 분쟁이 있어 우리 군대가 들어가겠으니 순순히 허락을 하든지 아니면 폭격을 받든지 하라는, 한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 협박이었다. 코소보분쟁은 CIA가 ‘더러운 공작’을 통해 다른 나라의 영토를 점령한, 희대의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밀로셰비치가 선 전범재판소에 빌 클린턴을 비롯한 유럽 수반들, 대통령들도 함께 서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과 유럽 진보진영에서는 지금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개입을 주장하면서 수천명의 민간인들을 살상한 행위도 반인류적 범죄행위로 묵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코소보 폭격이 끝나고 코소보평화유지군이 코소보의 질서와 안정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들어갔지만 평화가 정착됐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지금은 알바니아인들과 코소보평화유지군이 마찰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세르비아에서는 코슈투니차가 서방세계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원조를 구걸하고 있다. 한 민족이 두 가지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바로 코소보전쟁 이후 세르비아 민족이다. 유고사태를 다시 써나가면서 필자를 계속 고뇌하게 만들었던 것은 만약 우리 민족이 세르비아 민족과 같은 상황으로 내몰렸다면 과연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 youngsig@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