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나라의 죄없는 민간인들에게 수십년간 테러를 가한 ‘미제 폭탄’ 이야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두달째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민간인들의 희생이 늘어나면서 국제사회에서는 미군의 군사작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과 동시에 반전 기운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의 피해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의 성격을 규정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한겨레21>은 그동안 현대사를 얼룩지게 했던 미군의 공습들이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고,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점검해보는 것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동시에 전쟁의 야만성과 평화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병원과 의료기관 18곳, 200개가 넘는 보육원, 학교, 도서관, 박물관, 교회 파괴. 민간인 거주지역, 농산물창고, 상수도, 전력시설, 댐, 방송사, 교량 파괴….”
1999년 코소보전쟁 당시 미국이 주도한 나토군의 유고폭격 성적표인데, 이건 1949년 미국이 주창해서 “전쟁중에도 민간부문에 대해서는 절대로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제네바협정의 공격금지목록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과 한치의 오차도 없다. 게다가 그 78일 동안의 공습으로 민간인 4천여명과 유고 군인 1만여명을 폭사시켰다. 군인은 제쳐놓고라도 하루 평균 51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공습으로 죽였다는 결론이다.
미군과 나토군을 해방군으로 믿었던 코소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나토군의 코소보 진입을 취재했던 기자는, 크루샤라는 작은 마을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마을 앞 논에 미군의 크루즈미사일이 남긴 지름 30m가 넘는 거대한 탄공이 있던 이 크루샤마을은 600여채 가운데 60여채만이 온전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곳이다. 100여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이 마을 뒷동산에서는 심심찮게 폭발음이 진동했다. 나토군 폭발물처리반이 공습 당시의 불발탄을 회수해서 폭파시키는 소리였다. 걸프전과 코소보전|멍텅구리, 명중률 30%
공습이 끝난 뒤, 미군은 코소보 내의 불발탄이 전체 투하량 22만발의 5%쯤 되는 약 1만1천발 정도라는 발표를 한 적이 있다. 특히 이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클러스터밤(집속탄)이라 부르는 CBU-87/B형 폭탄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라오스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이 집속탄은 모탄의 파열과 함께 주먹만한 알갱이탄이 사방으로 뿌려져 발견과 회수에도 어려움이 따르는 치명적인 인명살상용 전문폭탄이다. 탱크 킬러 A-10기에서 발사된 열화우라늄탄(DU)이라 부르는 탱크잡이 전문폭탄들도 각종 유독성 물질과 방사능을 함유한 것으로 알려져 현재 국제적인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걸프전은 최소한의 희생자만 낸 현대적이고 깔끔한 전쟁이었다.” 부시 전 대통령이 흥에 겨워했던 그 세기적인 거짓말은 코소보에서도 이어졌다. 비디오 게임 같은 전쟁 중계로 세계인의 넋을 빼앗았던 1991년 걸프전의 ‘명사수’ 미군이 자랑하는 ‘현대전’은 코소보에서도 허구로 입증되었다는 뜻이다. 미군의 오폭으로 48명의 몰사자를 낸 버스나 또 58명의 사망자를 냈던 기차나 모두 현대전의 허구를 증명하는 한 단면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코소보와 유고에서 민간인의 희생이 컸던 까닭은 미국 정부의 발표와 달리 미사일이나 스마트밤(정밀탄)의 사용률이 전체 공습량의 8%에도 못 미치는 6250t에 그쳤기 때문이다. 나머지 92%의 공습은 B-52폭격기를 동원해 명중률이 30%에도 못 미치는 ‘멍텅구리탄’에 의존했다는 결론이다. 단기전을 연상하며 시작한 코소보전쟁에 최첨단 무기를 동원했던 미군과 나토연합폭격대는 소문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을 웃도는 막대한 전비에 허덕였던 상태라, 한발에 100만달러짜리 크루즈미사일이나 1만달러짜리 스마트밤을 사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미군의 오폭과 ‘싸구려전쟁’은 걸프전에서도 이미 증명되었다. “오직 쿠웨이트해방만이 목표일 뿐”이라는, 걸프전의 영웅 콜린 파월합참의장(현 국무장관)의 말도 앞선 부시의 말과 함께 20세기 최대의 거짓말로 손색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44일간의 단기전에서 미군의 공습은 이라크 군인 10만명(대부분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던 군인들에 대한 후미공격)에다 민간인 20만명을 합해 모두 30만명의 희생자를 기록했다. 당시 미군이 사용한 총폭량은 히로시마형 핵폭탄의 7배가 넘는 8850t을 웃돌았고, 공습횟수는 하루 평균 2497회를 기록했다. 세계전사에서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물량을 투입하고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은 결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걸프전쟁은 인류사에서 가장 전근대적인 전쟁, 가장 비열한 전쟁, 가장 비인도적인 전쟁으로 기록할 만하다. 이 피의 잔치를 놓고 부시 전 대통령은 축배를 들면서 외쳤다고 한다. “이제 베트남전쟁의 악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단 한발의 미국제 미사일이 1186명의 아이들과 어머니들을 즉사시킨 바그다드의 아미리야 방공호가 아직도 밤마다 울고 있고, 지난 10년 동안 공습과 경제봉쇄로 60만명이 넘는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말이다.
라오스|9년 동안 8분에 한번씩 공습
“폰캄(30·주부), 아들(7)과 딸(4) 폭사. 옹타모아(61·농민), 아들(16) 폭사.”
6년 전 라오스 취재노트에 기록된 주민 이름과 숫자들이다. 다시 정리해보니 5명 사망에다 20명 중상자 발생이다. 이건 전체 주민 200명 가운데 12.5%에 해당하는 이들이 불발탄 사고를 당했다는 뜻이다.
라오스 중부산악지대 샹쾅에서 동쪽으로 약 30km쯤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뇽음이라는 작은 마을의 이야기다. 왜 이 산골마을에 이처럼 많은 불발탄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는가. 그 대답은 37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64년 5월25일, 이 산간지대에 나타난 미군 T-28 전폭기가 500파운드의 네이팜탄을 쏟아부으면서부터 뇽음마을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은 라오스의 반미·사회주의 ‘애국라오군’을 박멸하고 라오스를 지나는 북베트남군의 보급로였던 ‘호치민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이른바 비밀전쟁(Secret War)으로 불렸던 그 작전에 따라 라오스의 소수민족인 몽족을 반사회주의 방패로 훈련시켜 애국라오군에 맞서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차별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그로부터 라오스는 1973년까지 9년 동안 무려 700만개의 각종 폭탄 세례를 받았다. 그 가운데 30만t의 폭탄이 뇽음마을을 비롯한 민간인들의 삶터인 샹쾅지역을 강타한 것이다.
당시 인구를 따져보면 샹쾅 주민들은 1인당 2t이 넘는 폭탄을 뒤집어쓴 셈이고, 전쟁이 끝난 뒤 샹쾅지역은 단 한채의 집도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없는 완전한 폐허로 변했다. 미 공군은 그 9년 동안 라오스에 무려 58만344회 출격해서 폭탄을 퍼부었는데, 이건 평균 8분마다 라오스를 공습했다는 뜻이다. 이건 단일지역 대상 공습으로는 전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이다. 그 공습비용만도 69억달러에 달했다. 군조종사들의 월급이나 간접비용을 제외하고도….
이 돈은 현재 지뢰고문단(MAG) 같은 민간 폭발물제거단체들이 샹쾅지역에서 주민안전교육과 불발탄제거 사업에 투입하는 1년 예산의 6900년치와 맞먹는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난 1974년부터 따져보아도 샹쾅지역에서만 635명이 불발탄으로 목숨을 잃었고 530명이 중상을 입었다(1996년 취재노트). 이 희생자에 대한 조사와 취재는 샹쾅이라는 한 지역만을 대상으로 삼았을 뿐, 라오스 전체의 불발탄 희생자 숫자는 아직 밝혀진 적이 없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미군의 불발탄이 아직도 라오스에 살아 있을까. 추정해보면 대개 공습용 폭탄의 15∼25% 정도가 불발하는 것으로 미루어 100만개에서 150만개 정도의 불발탄이 아직도 라오스에 묻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미국은 ‘아직도’ 말이 없다. “베트남 공습을 위해 타이에서 출격한 미공군 폭격기들이 기상악화와 같은 조건을 만나면 그냥 라오스에 폭탄을 뿌리고 돌아왔다.” “라오스를 집속탄과 공중살포용 지뢰의 실험지로 삼았다.” 당시 미공군 폭격기 조종사들의 증언은 미군의 라오스 폭격이 얼마나 야만적인 것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지만, 그래도 미국 정부는 ‘아직’ 말이 없다.
37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라오스에서 미국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37년 전의 미국 폭탄들이 아직도 ‘시한폭탄’처럼 라오스의 시민들을 노려보고 있다.
캄보디아|크메르루주 저리가라!
“캄보디아 공습명령을 받고 출격했지만 어디에도 공격 목표물이 될 만한 게 없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아야 했다.”
미군의 만행을 스스로 고발한 도널드 도슨 대위(B-52 부조종사)는 결국 1973년 6월19일 폭격명령을 거부한 죄로 법정에 섰다. 이 양심적인 사건은 이미 베트남전쟁의 패색이 짙게 깔린 미국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며 반전운동을 폭발적으로 고무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캄보디아가 베트남에 붙어 있다는 지리적 조건 하나로 미국의 융단폭격을 당한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라오스의 비밀전쟁과 함께 30년이 지났지만 조사 한번 이루어진 적 없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폭격자이자 공격자인 미국 정부가 사실을 은폐하고 침묵하고 있는 탓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은신처가 되고 있는 캄보디아를 격리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1969년 초 닉슨 대통령의 물음은 펜타곤을 거쳐 즉각 사이공의 미군 사령관 크레이튼 에이브럼즈에게 도달했고 ‘폭격’이라는 그의 대답과 동시에 3월18일 ‘아침작전’ 아래 미 공군의 전술폭격기 B-52가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캄보디아는 난데없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북한의 미군 정찰기 EC-121 격추사건으로 이번에는 ‘점심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또다시 융단폭격을 당했다.
“미군에 대한 부당한 공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베트남과 북한지도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캄보디아 공습을 요청한다.” 닉슨의 이 명령이 대캄보디아 공습의 부당한 역사성을 폭로하기에 손색이 없었지만, 결국 캄보디아 내 베트콩기지 공격을 내세운 이른바 ‘메뉴프로그램’에 따라 캄보디아에는 ‘간식작전’, ‘저녁작전’, ‘후식작전’이라는 기괴한 작전명을 단 미군의 공습이 1973년 8월15일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미 공군은 25만7465t의 폭탄을 캄보디아에 투하했는데, 이건 2차대전 중 미군이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만t을 훨씬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다. 그 결과 최소한 50만명이 넘는 캄보디아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미국이 밝힌 공식 입장은 1973년 키신저 국무장관의 발언이 전부다. “캄보디아에 대한 공습이 아니었고, 캄보디아에 거점을 차린 베트콩을 공격했을 뿐이다.” 기자가 현장을 취재한 바로는 당시 베트콩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던 칸템(57·당시 바탐방의 미군병참부대 RM3 근무)의 경우 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소본(63·당시 미군소속의 공수부대원)은 자신의 눈앞에서 자식 둘과 아버지, 동생, 조카까지 모두 다섯명이 한꺼번에 폭사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베트콩의 그림자조차 본 적이 없다는 깜퐁프놈 마을, 당시 미군의 거듭된 폭격으로 2천명의 주민들이 모두 피난을 떠났던 캄보디아 한 남부마을의 이야기다.
1975년 폴포트의 크메르루주가 장악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이보다 앞서 미군이 벌인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말하는 이들은 세상에 별로 없다. 그리고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캄보디아 땅에는 미군이 뿌린 불발탄들이 대를 이어 양민을 타격목표로 삼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당했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미군의 불발탄으로 죽임을 당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불발탄들이 살아남아 있는지 캄보디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격자의 해묵은 침묵과 희생자들의 불행한 역사만 흘러가고 있을 뿐….
글·사진 정문태/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사진/ 캄보디아의 마을 논 한가운데 25년 동안 폭발하지 않은 채 박혀 있던 불발탄. 뇌관이 손상되지 않은 채 살아 있음을 전문가와 함께 확인해서 동네 사람들마저 놀랐다.
미군과 나토군을 해방군으로 믿었던 코소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나토군의 코소보 진입을 취재했던 기자는, 크루샤라는 작은 마을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마을 앞 논에 미군의 크루즈미사일이 남긴 지름 30m가 넘는 거대한 탄공이 있던 이 크루샤마을은 600여채 가운데 60여채만이 온전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곳이다. 100여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이 마을 뒷동산에서는 심심찮게 폭발음이 진동했다. 나토군 폭발물처리반이 공습 당시의 불발탄을 회수해서 폭파시키는 소리였다. 걸프전과 코소보전|멍텅구리, 명중률 30%

사진/ 단 한발의 미국제 미사일이 1186명의 이라크 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바그다드의 아미리야 방공호(위). 바그다드의 후세인 소아병원(아래). 미국의 폭격과 경제봉쇄로 60만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숨졌다.

사진/ 코소보전쟁 당시 미군이 세르비아군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으로 믿었던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미군 폭격으로 재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의 큰 혼란을 겪었다.

사진/ 베트남 전쟁동안 타이에서 발진한 미 공군기들은 베트남으로 가다가 기상이 악화되면 라오스에 폭탄을 퍼붓고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