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슬픈 발칸(상)-종교분쟁
종교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한 밀로셰비치·이제트베고비치·투지만이 주는 교훈
세계의 시선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모아진 가운데 2년 전에 있었던 미국의 유고폭격은 잊혀져가고 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한 모퉁이에서는 지금도 작은 전투가 매일 벌어지고 있으며 언제 다시 전면전으로 타오를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발칸분쟁은 세계의 치부를 드러내주는 창이다. 현지취재 등을 통해 발칸문제를 연구해온 하영식 통신원이 서방언론에 의해 왜곡된 발칸분쟁의 진실을 3차례에 나눠 밝힌다. 편집자
발칸분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만큼이나 쉽게 사그라질 것 같지 않다. 사이좋은 이웃이 아니라 증오하는 이웃으로 지금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이 같은 지역에서 각기 다른 문화와 종교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에서 벌써 갈등의 여지를 보게 된다. 동시에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길목이라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다는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발칸분쟁은 내부에서 시작됐든 외부에서 주입됐든 금방 세계적 차원의 분쟁으로 전화된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의 계기가 됐던 오스트리아 황태자암살사건에서도 잘 나타난다.
티토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그곳엔…
티토의 신화적 카리스마가 발휘되던 시절 유고연방 국가들인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는 각기 다른 종교와 문화를 지켜오면서 공산주의라는 대원칙 아래서 통합된 하나의 국가였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는 정교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가톨릭으로 각기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입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매년 6월28일은 세르비아의 민족적 기념일이다. 1389년 이날,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흑까마귀벌판’에서 터키병사들과 한판 승부를 벌였고, 여기서 국왕까지 전사하는 민족적 패배를 당했다. 이때부터 세르비아는 오토만제국에 무려 400년 동안 지배당하게 된다. 오토만제국은 그 영향력을 넓히면서 나중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까지 점령하여 전 발칸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발칸’이란 이름도 터키어에서 ‘산맥’을 의미한다.
발칸이 터키에 점령당하기 전 이곳은 비잔틴제국의 영향을 받아서 모두 정교회로 개종한 상태였다. 그러나 무슬림국가였던 오토만제국의 끈질긴 개종정책으로 많은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스니아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했고 남서쪽의 알바니아인들도 터키에 의해 모두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이후 16세기 초 발칸북부가 오스트리아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지금까지 가톨릭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렇게 터키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거치는 동안 발칸은 세 종교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80년대 말이 되면서 슬로베니아를 시작으로 독립국가로서 유고연방을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 격동기에 발칸에서는 세명의 지도자가 출현하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를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해 피를 불러들인 장본인들이다.
티토가 사망한 뒤 세르비아 출신의 밀로셰비치가 등장하면서 유고연방의 대통령으로 정치적 공백을 메우게 된다. 그러나 티토와 달리 그는 강한 세르비아민족주의 성향을 드러내면서 당시에 분열됐던 연방 내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느슨하게나마 통합시키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 대립을 부추기는 화근이 된다. 이는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진 이후 독립국가연합으로 느슨하게나마 연대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민족간의 대립과 전쟁을 최소화했던 러시아와는 대조적이다.
1989년 6월28일 코소보전투 600주년 기념식에서 밀로셰비치는 유럽으로의 이슬람교 확산을 저지시킨 세르비아민족과 정교회의 영웅주의를 찬양했다. 또한 당시 알바니아분리주의자들에 의해서 소요가 끊이지 않았던 코소보를 유고슬라비아, 즉 세르비아의 한 부분으로 남겨놓을 것임을 못박았다. 이날의 연설을 통해 밀로셰비치는 정교회의 대이슬람투쟁이라는 종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부여함으로써 당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불을 댕긴 꼴이 되었다. 당시 코소보는 유고연방에서도 알바니아인들의 자치주였다. 이 연설을 한 지 정확히 10년 되던 해,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나토의 폭격으로 비참한 상황을 맞게 된다. 나토 폭격 당시에 같은 정교회국가였던 그리스와 러시아 등에서 심한 반발을 한 것은 당연하다. 특히 아테네에서는 미국대사관 앞에서 100차례 이상의 반미시위가 있었고 반알바니아 정서가 퍼져나갔다.
정교, 이슬람, 가톨릭의 정치적 충돌
같은 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이제트베고비치는 민주실천을 위한 무슬림당(SDA)을 창당하기 위해서 아랍국가들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그는 반국가적인 무슬림운동으로 투옥되어 14년을 선고받고 6년을 복역한 뒤 출옥한 상태였다. 당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3개의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가 혼재된 상태였으나 무슬림인구가 다수를 차지했다.
1990년 11월18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총선에서는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무슬림당이 86석을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고 그뒤를 이어 세르비아당이 72석을 차지했고 마지막으로 크로아티아당이 44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총선결과에 따라 다수당 대표에게 1년 재임의 순번제 대통령직이 돌아갔다. 순번제 대통령직은 다른 소수민족들에 대한 정치적 배려에서 나온 각 민족정당들간의 합의사항이었다. 그러나 이제트베고비치는 1992년 자신의 대통령직을 세르비아당 대표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하고 그대로 대통령직을 지켰다. 이로써 세 민족간의 정치적 공존의 기반이 무너졌다. 이후 반세르비아전투가 본격화되면서 중동과 아프가니스탄, 북아프리카지역에서는 수천명의 무슬림전사들이 ‘무슬림국가건설’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휴전이 성립된 뒤 많은 수의 아랍국가 출신의 무슬림전사들은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보스니아 여인과 결혼을 하면서 이곳에 체류했다. 지난 9월11일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있은 뒤 ‘악명’을 떨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해외조직망도 이곳에 건설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미국과 유럽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는 국가 중 하나가 됐다.
이와는 별도로 크로아티아에서는 투지만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티토의 공산군에 입대하여 나중에 소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크로아티아파시즘 부활을 위한 운동은 그를 감옥으로 내몰아 3년을 복역하게 했다. 그는 미국에서 크로아티아파시즘에 관한 책을 출판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통해서 2차대전 중에 대학살을 저질렀던 크로아티아의 나치우스타쉬 정권과 가톨릭교회를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했다. 그리고 당시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 내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총선을 통해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다음해(1991)에 크로아티아의 가톨릭 주교들이 전세계의 주교들과 천주교회에 공개서한을 발송한 사건이 있었다. 서한에서 크로아티아 가톨릭주교들은 베오그라드 정권이 정교회의 지원을 받고 또한 이를 통해서 유지되며 공산주의형태의 사회주의를 지속해나가기를 원한다고 썼다. 그리고 유고의 정부와 군부는 세르비아민족에 의해 지배되며 또한 행정관료들이나 군부요인들은 중앙집권주의자들로서 서구문화와 민주주의전통을 완강히 반대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 서한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미국에서는 이 서한이 대유고정책의 기본방향을 좌우하는 주요한 변수로, 서구언론매체들의 반세르비아 여론몰이의 도구로 오랫동안 그 위력을 발휘했다. 대통령이 된 뒤 투지만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했고 다시 사흘 뒤에는 자그레브 스타디움에서 가톨릭교회 신부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군대행진 행사를 거행하고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축복을 받았다. 당시 갈리 유엔 사무총장이 제출한 공식보고서에서는 1991년에서 1992년 사이 크로아티아의 인종청소캠페인으로 약 25만명의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에서 추방됐고 수천명이 학살당했음을 밝히고 있다.
발칸분쟁과 대테러전쟁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있은 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십자군전쟁’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이후 엄청난 반발이 일자 부시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는 소동까지 빚었다. 걸프전 당시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도 기독교의 하나님과 아랍의 알라신의 전쟁을 선동했다. 이처럼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반 민중의 순수한 종교적 열정을 이용하는 데 서슴없다는 사실을 발칸분쟁의 전야에서도 볼 수 있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 youngsig@otenet.gr

사진/ 나토의 폭격으로 파괴된 정교회 수도원. 이 폭격은 같은 정교회 국가였던 그리스와 러시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티토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그곳엔…

사진/ 현재 헤이그 국제전범법정에 회부된 밀로셰비치의 재임시 모습. 그에게 정교회는 어떤 의미였을까.

사진/ 보스니아 대통령 이제트베고비치. 그는 무슬림 사이에서 발칸의 지도자로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