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아보타바드의 은신처에서 오사마 빈라덴이 자신이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다. 빈라덴 사살 뒤 수색한 은신처의 비디오카메라에 포착된 모습이다. 펜타곤 제공
쿠와이티란 이름이 미국 수사 당국에 드러난 지 3년 만에 그의 역할이 처음으로 언급된 순간이었다. 2005년 5월2일 리비도 파키스탄에서 체포됐다. 그 역시 쿠와이티에 대해 언급했으나, 알카에다에서 중요한 대원이 아니라고 했다. CIA는 KSM이나 리비라는 알카에다 최고위층 인물들이 쿠와이티를 평가절하하는 데 계속 의문을 가졌다. 하위 대원들은 쿠와이티의 역할과 행적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진술하는 데 비해, 최고위급 간부들은 그가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부인했다. 2007년 드디어 쿠와이티의 실체에 접근하는 돌파구가 열렸다. CIA는 ‘제3국’의 도움으로 쿠와이티의 실명을 알아냈다. 이브라임 사에드 아메드. 그 실명을 찾기까지 6년이 걸렸다. 그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는 다시 3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도청에 이은 미행, 그가 들어간 3층 건물 그사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다. 수사팀에는 부시 행정부 때와는 다른 재촉과 압력이 가해졌다. 2008년 6월2일 오바마는 패네타 국장에게 30일 내로 빈라덴의 소재를 파악해 그를 체포하는 세부 계획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010년 여름, 드디어 돌파구가 열렸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감청한 한 이동전화의 통화는 쿠와이티의 행방을 찾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디에 있었어? 보고 싶었어. 요즘 어때? 뭘 해?” 상대방이 반갑게 물었다. “전에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돌아와 있어.” 아랍어와 파슈툰어 악센트가 섞인 대답은 간결하고 애매했다. 상대방은 이 대답의 의미를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이 도우실 거야!” 3년 전 쿠와이티의 실명을 파악했던 CIA는 그의 실체를 밝히는 광범위한 수사를 벌여왔다. 그 결과 그가 쿠웨이트로 이주한 파키스탄의 대가족 출신임을 알아냈다. 미국 정보 당국에는 2010년 6월 쿠와이티의 이동전화에 접근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렸다. 그와 동생이 갑자기 이동전화기와 그 서비스를 교체하면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감청 기술 개선도 한몫했다. 마침내 그해 여름 CIA가 감시하던 중동 걸프 지역에 있던 쿠와이티의 한 친구가 전화를 했다. 이를 통해 쿠와이티의 전화번호와 통화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쿠와이티의 대답은 그가 빈라덴의 핵심 측근들과 같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전화는 언제나 꺼져 있어서, 그가 잠깐 전화를 사용할 때 위치를 파악해 미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8월 들어 CIA의 파키스탄 현지인 정보원이 페샤와르에서 그를 포착했다. 스페어타이어를 뒤에 단 하얀색 스즈키 지프가 쿠와이티의 차량이었다. 현지인 정보원은 그 차량의 뒤를 쫓았고 그는 페샤와르에서 동쪽으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아보타바드에 도착했다. 쿠와이티는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요새처럼 지어진 3층짜리 건물로 들어갔다. 쿠와이티는 6년 전인 2004년 처음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보타바드 비랄 마을 주변의 농경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모습의 파슈툰인인 쿠와이티는 삼촌을 위해 이 땅을 산다고 말했다. 모두 1200평이 넘는 넓은 땅이었다. 쿠와이티는 층마다 4개의 방과 욕실이 있는 2층 건물의 설계를 현지 회사에 의뢰했다. 12명 이상의 가족이 살기 적합하게 만들어달라고 했다. 건축 도중에 갑자기 한 층이 더 추가됐다. 3층은 밑의 두 개 층과는 달랐다. 오직 한 면에만 창문들이 있었고 그 창문들은 불투명했다. 5개 창문 중 4개는 눈높이보다 위에 있었고, 구멍 정도의 크기였다. 작은 테라스는 210cm 이상 높이의 벽으로 둘러쌌다. 테라스 안에 누가 서 있는지를 밖에서는 알 수 없었다. 190cm의 장신인 빈라덴을 감추려는 것이었다. 아보타바드의 건물은 빈라덴이 스스로 만든 감옥이었다. 그는 2005년 말부터 이 건물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올 때라곤 방수포가 쳐진 정원에서 산책을 할 때뿐이었다. 방수포는 빈라덴을 미국 위성의 감시로부터 가리는 보호막이었다. 전화나 인터넷 등 현대 통신시설은 일절 없었다. 쓰레기도 소각해 처리했다. 2005년 말부터 이 안전가옥에서 빈라덴과 3명의 부인, 10명의 자녀와 손주, 그리고 연락책인 쿠와이티와 그 남동생 내외 4명, 쿠와이티의 자녀 4명 등 모두 22명이 살았다. 빈라덴이 있을 확률 최대 90%, 최소 60% 세계가 찾고 있는 수배자 빈라덴에게 아보타바드의 6년은 결코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에 둘러싸여 지냈고, 그가 주도한 성전도 진행 중이었다. 붕괴 직전이던 알카에다는 이라크나 다른 이슬람권 국가에서 재건됐다. 그를 추적하는 미국은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2010년 8월 말 아보타바드 가옥에 대해 보고를 받은 패네타 국장은 “그거 매우 이상하군. 더 깊은 수사가 필요해. 그 가옥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모든 공작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즉각 보고했다. “연락책의 이름과 아보타바드라는 거주지도 알았습니다. 빈라덴도 거기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바마는 당시 이 보고에 관심이 끌렸으나 의심스러웠다고 회고한다. 그 뒤 몇 개월 동안 미국 정보수사 당국은 아보타바드 가옥의 실체를 파악하려 했으나, 그 안에 살고 있는 의심스런 인물 ‘페이서’의 실체를 밝히는 ‘스모킹건’, 즉 직접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서행자’라는 뜻의 페이서는 방수포가 쳐진 그 가옥의 정원에서 산보하는 인물을 뜻한다. CIA는 △악취 폭탄을 터뜨려 가옥의 거주자들을 모두 밖으로 몰아내는 안 △하늘에서 들리는 알라의 음성을 흉내 내어 거주자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안 △위장 백신 검사를 이용해 거주자들의 DNA를 확보하는 안 등 모두 38가지의 공작안을 마련해 보고하기도 했다. 11월 들어 CIA는 오바마에게 아보타바드 가옥에 빈라덴이 있을 확률은 최대 90%에서 최소 60%라며, 사실상 워싱턴 지도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보고를 했다. 이제 더 이상 간접적 수사와 추측은 무의미하며 직접 그 가옥을 뒤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2011년 1월 말 오바마는 아보타바드 가옥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선택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드디어 군사작전안 입안이 시작됐다. 아프간에서 합동특수작전사령부를 지휘하던 해군 제독 윌리엄 맥레이븐에게 그 임무가 떨어졌다. 맥레이븐은 해병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해병특수부대 실(SEAL)팀을 구성하고, 작전명을 ‘아보타바드 가옥 1’(AC1)으로 명명했다. CIA는 이 작전명을 다시 ‘애틀랜틱시티’로 암호화했다. 2011년 3월14일 백악관에서 오바마와 외교안보 고위 참모와 각료들은 아보타바드 가옥 작전에 대한 최종 선택을 논의했다. 테이블에는 △B2 폭격기에 의한 폭격 △무인기 드론 공습 △미군의 단독 급습 △파키스탄과의 협력 등 4가지 안건이 올라왔다. 난상 토론이 벌어졌다. 미군의 급습 작전을 제외하고는 빈라덴이 거기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특히 패네타와 맥레이븐은 미군의 급습을 지지했다. 맥레이븐은 오바마에게 직접적으로 얘기했다. “대통령 각하, 만약 우리가 이 작전을 한다면 나는 각하에게 돌아와 그 결과를 그대로 보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바마가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하냐?”고 묻자, 작전 연습에 3주가 더 필요하다고 답했다. 오바마는 “그럼 움직이는 게 좋겠네”라고 급습 작전을 재가했다. 해병특수부대 급습팀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아보타바드 가옥을 똑같이 지어놓고 연습에 들어갔다. 4월29일 오바마는 백악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 작전의 최종 재가를 했다. “이제 가자. 날씨 등의 상황으로 우리 병력에 위험이 증가할 거라고 맥레이븐과 그 대원들이 판단할 경우에만 작전을 취소할 수 있다.” 사살 반년 전 불붙은 ‘아랍의 봄’ 5월1일 밤 11시 아프간 잘랄라바드 미군기지에서 두 대의 블랙호크 헬기가 이륙해 파키스탄 영내를 순식간에 넘어 아보타바드로 향했다. 작전명 ‘넵튠의 창’. 자정 직후 아보타바드의 가옥 밖에서 이상한 굉음과 폭발음이 들렸다. 빈라덴의 딸 마리암은 아버지가 있는 3층 침실로 올라와 ‘뭔 일이냐’고 물었다. 빈라덴은 “내려가서 침대로 가라”고 말하고, 부인 아말에게 “불을 켜지 말라”고 지시했다. 빈라덴의 마지막 말이었다. 빈라덴은 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창문이 테라스에 가려진데다 좁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15분간 침묵하며 기다리던 빈라덴은 혼란이 더해졌다. 그의 옷에는 몇백달러의 유로화와 두 개의 전화번호가 바느질로 봉해져 있었다. 빈라덴은 방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빈라덴의 연락책 쿠와이티 등을 사살하고 3층까지 진입한 미군 특공대원 3명에게 포착됐다. 빈라덴은 즉각 문을 닫았으나, 문을 잠그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특공대원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대원은 마주친 2명의 여인이 자살폭탄 조끼를 입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그들을 제압했다. 세 번째 여인인 부인 아말이 소리를 지르며 남편 빈라덴에게 몸을 던졌다. 그녀는 다리에 총을 맞고 침대에 쓰러졌다. 두 번째 대원이 키가 큰 남자를 발견했다. 빈라덴이었다. 대원은 그 남자 곁에 두 자루의 총이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머리에 총을 두 방 쐈다. 빈라덴은 사살당할 때 저항하지 않았다. 총을 맞은 그의 뇌는 천장까지 튀었고, 눈은 밖으로 나왔다. 바닥은 빈라덴의 피로 흥건해졌다. 세계 최강국 미국이 모든 국력을 동원해 10년 동안 찾던 인물의 최후였다. 오바마의 전쟁은 개가를 올렸다. 하지만 그때 이라크와 아프간의 전황은 다시 악화되고 있었다. 빈라덴 사살 반년 전에 아랍에서 불붙은 민주화운동 ‘아랍의 봄’은 미국이 바라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의길 <한겨레>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